내가 포도를 안 먹는 이유
우리 고향 마을 어귀에 포도 과수원이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살짝곰보였는데 성질 더럽기로 소문이 났고 우리는 그를 별명으로 꼼보라고 불렀다.
중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 나는 2,3학년 형들과 어울려 갑자기 포도서리를 하기로 과감히 결정을 했다.
울타리가 견고하고 꼼보가 독해서 감히 누구도 서리할 생각을 못해 왔지만 누군가 꼼보가 읍내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기에 즉석 결정을 했고 철옹성같은 포도밭을 우리는 간도 크게 대낮에 정문을
이용하기로 작정을 했다. 참외나 수박 서리는 울타리가 없기에 밤에 눈에 안 띄게 옷을 홀랑 벗고
살금살금 기어 모기가 물어뜯어도 참으며 해 본적은 있지만 정문으로 그 것도 대낮에 들어간다는 것은
어쩐지 께름직하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형들이 결정한 일이라 반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동참을 했다.
그러나 침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준비 부족으로 맨손으로 포도송이를 딴 다는 것은 결정적 실수였다.
왜 그리 안 끊어지는지 포도송이를 받치고 있는 굵은 철사 줄이 팅!팅! 울고 소리가 요란해서 개가 짖기
시작하고 꼼보 아줌마의 앙칼진 목소리를 들으며 정문으로 뛰어 나올 때 읍내 갔다던 꼼보는 집 앞에
우뚝 서 있었다. 형들은 다시 안으로 도망쳤지만 나는 붙들리고 말았고 결국 형들도 하나둘 스스로 걸어
나오고 우리는 꼼보한테 엎드려 뻗쳐서 볼기를 맞고 기합을 받고 너희들 부모한테 포도밭을 망가뜨렸으니
포도 값을 받아야 한다며 동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우리는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서울로 도망치기로
하고 역전에 가서 충북선 기차를 몰래 탔다.
조치원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 기다리다가 밤을 맞았고 우리는 대합실에서 쪼그리고 잠을 잤다.
하지만 나는 배가 고프고 집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고 결국 형들한테 바보 소리를 들으며 헤어져 혼자
집으로 가기 위해 몰래 다시 기차를 탔다가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차장만 보면 슬금슬금 피하다가 의심을
받고 붙들렸고 어느 고마운 아저씨의 도움으로 계란 세 개도 얻어먹고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혼날 줄만 알았는데 어머니는 반가이 울음부터 터뜨리는 나를 껴안았는데 어머니도 분명 눈물을 훔치는
것을 보았고 아버지는 그 일에 대해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그 날 부모님의 사랑을 어렴풋이 알았고 진정 부모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는 불행이라는 사실도
후일에 알았다
서울로 도망친 형들도 뿔뿔이 흩어져 갖은 고생을 하고 이틀 간격으로 최후 1 주일만에 모두 돌아 왔고
꼼보는 우리를 때렸다는 이유로 그리고 가출을 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동네에서 요즘 말로 왕따가
되었었다.
그리고 중3이 되어 국어 교과서에 이육사의 [청포도]라는 시를 배우며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계절.
그 고장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어쩌구 저쩌구
우리의 독립을 염원하는 내용이라던가 뭐라던가 배우면서도 나는 조치원 대합실에서 배고파 고생하던
그 때 아픈 추억에 진저리를 쳤었다.
성인이 되어 어느 여자와 연애를 할 때 우리끼리는 결혼을 약속하고 멀리 여자 집에 첫 인사를 갔었다.
해인사 인근 시골 농원이었는데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그 집에 장학사 손님들이 와서 그 날은 찾아가지
못하고 그녀와 해인사 관광을 하고 나는 여관에서 하루를 자고 이튿날 준비해 간 양주 한 병을 들도
여자의 안내를 받으며 찾아갔다. 그 지역 고등학교장인 아버지에게 예의를 갖춘다고 큰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앉았으며 다행히 편히 앉으라고 권유하기에 마지못한 척 편히 앉았고 뭔 이야기가 그리 길던지
지루하고 걱정이 되고 나를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에 더 땀이 났지만 1차 면담이 끝나고
우리는 시원한 다락방으로 올라가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졌었는데 나는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처제 될 사람이 포도를 한 쟁반 가져와서는 반갑다고 했던가 축하한다고 했던가.
또 어머니가 오셔서 과일이라도 많이 먹으며 편히 쉬다 가라면서 마음을 놓게 해서 조금은 안정을 찾았었고
여자도 잘 될테니 걱정 말라고 위로해 주어 잠시 착각 속에 빠지기도 했다.
근데 여자는 자기만 먹으면 되지 나에게도 포도를 권하며 내 입에 포도를 넣어 주는데 그 때 꽈리를 씹듯
꼭 눌러서 알만 내 입에 넣어주고 껍질만 빼가던 그녀.
뒤에 뭔 일이 닥칠지 전혀 염두에 없이 그 포도의 향긋하고 달콤하며 시원한 맛과 즐거움....
그 때처럼 행복한 순간도 없었을 것이다.
어린 제비새끼처럼 입만 벌리고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입에 달콤하게 넣어 주었으니까.
여자도 사랑하는 마음에 나한테 포도를 손수 먹이며 행복해 하지 않았었을까.
나는 차마 씨를 뱉을 수가 없어 씨까지 삼킬 정도였으니...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저절로 눈이 지그시 감겨진다.
하지만 나는 그 여자의 아버지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헤어져야만 했다. 이별 후에 먹어 본
포도 맛은 전에 그 맛이 아니었고 어인 일인지 그 때부터 포도만 먹으면 입술이 따끔거려 견딜 수 없는
포도 알레르기가 생겨서 지금 까지 포도는 먹지 않는다.
아마도 상처가 깊었던 탓일까. 충격이 큰 탓일까.
의사선생님은 사람마다 특정 식품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식품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란다. 아마도 정신과 상담을 받으면 알레르기가 없어질지도 모르지만.
다만 포도는 먹지 않지만 해마다 포도주는 담가서 술로 마시는데
한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그리고 한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마지막 한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느님을 위하여...
이렇게 속으로 조지훈님의 [사모]라는 시를 생각하며 술을 마셨다.
아내는 내가 포도주를 무척 좋아하는 줄 알고 해마다 시키지 않아도 포도주를 커다란 유리병에 꼭 담가
놓는데 올해는 내가 포도주를 담그지 말라고 했더니 의아한 눈빛으로
'어쩐 일이세요. 술을 끓을려나. 아님 포도주가 이제 싫어 진거여요?' 했다.
나는 포도주가 이제 싫다고 하며 씩! 그냥 웃고 말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래, 이제는 망각이다. 잊어주마. 혐오스런 그 포도를...
사랑의 배신자에게 주는 가장 큰 복수는 망각이라 했던가.
어린애가 꼭 잡고 있다가 놓쳐서 날아가는 풍선처럼 이제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그 풍선을
훌훌 날려 보내고 싶다.
그러면 포도 알레르기도 없어질까.
2002. 9. 23. -운 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