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 해를 보내며
x월 x일
보던 책을 이제야 끝내다.
책 보다는 컴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더 많으니 그럴 수밖에...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 모순.
현실은 언제나 이론을 따라잡지 못하는 법이다. 어떠한 고통도 그 것을 당하고 있는 순간은 고통이
아니란다. 고통은 언제나 그 것이 지나고 난 후에 기억으로만 존재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절망은 가장 치열하고 순수한 경쟁이며 사람이 불행해 지는 것은 철저히 절망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나는 그 동안 얼마나 좌절하고 실망했던가.
하지만 키게르 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듯이 사람인 이상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지않을까. 그러나 희망은 거짓말을 너무 잘하기 때문에 희망에는 반드시 성실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한다.
x월 x일
가평서 술 마시고 오는 밤 열차에서 앞, 옆자리의 군인과 젊은 아가씨들과 같이 오게 되는 행운을 가졌었다.
물같이 흐르는 세월이라더니, 그 군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엊그제 같던 나의 군대생활 시절을 그려보며
힘없이 웃어 보지만 벌써 25년 전의 일이 아닌가.
나도 그 때는 그렇게 패기에 넘쳐흐르고 아름다운 연애도 해보고 꿈도 많았건만 지금의 내 모습을 생각해
내고 또 그 군인의 미래를 생각해 보며 씩!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는 얘기도 잘 하신다며 깔깔대던 아가씨들이 뭐, 내 나이가 마흔 다섯 아래라고 했던가?
한 때 나이를 위로 속여 부르던 때가 있었는데 부질없던 시절이었고 지금은 서러울 뿐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지금까지 살아 온 날보다 더 적은 사람들을 중년이라고 한다던가. 그러나 나는
중년이라고 아직은 말하고 싶지 않다.
아직도 마음은 영원히 소년이고 싶은 심정이니까...
x월 x일
책장을 정리 하다가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20년 전의 사진이었나 보다.
꿈속에 보듯 약간 장발의 젊은 얼굴, 한 때 장발을 단속하던 때는 볼품 사납게도 머리를 기르고 퍼머도
하고 다녔건만 지금은 기를 머리도 없고 퍼머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아내에게 말했더니 아내가 코웃음을
친다.
참으로 한심하고 슬프다.
꿈 많던 시절, 정열적인 가슴으로 연애하던 그 추억은 투명한데...
다시는 오지 않을 아! 옛날이여!
지나간 시절이 그립고 아쉽게 생각되는 것은 점점 늙어 간다는 징조이고 지나간 시절이 괴롭고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이미 늙어 버린 것이라고 했는데 나는 벌써 늙어 버린 것일까.
x월 x일
고향 선배의 부음을 받았다.
엊그제 이 동네 한 아저씨의 죽음을 보았을 때도 그랬고 지난 번 친구 부인이 갑자기 저 세상으로 먼저
가셨을 때도 인생무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고향에 가면 늘 반갑게 맞아 주시고 한 때는 우리 조상들의 산소도 관리해주고 우리 땅도 관리해 주며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던 먼 친척 형인데 그러고 보니 그 형과 술을 마셔 본지도 벌써 2년이 넘었나 보다.
겨울이 되면 갑자기 죽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무얼까.
추위 때문일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이라서 일까.
올 해는 유난히 유명인들의 죽음도 많았던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죽어서 까지 살아있는 사람들 추운데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서 겨울에 죽고 싶지는 않다.
인(因)따라 왔다가 연(緣)을 다하면 알 수 없는 세계로 가버리는 우리네 인생.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면 누가 먼저 갈는지 아무도 모르고 죽는 순서는 선후배가 없다듯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한 발 한 발 죽음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당연한 깨달음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면 삶의 회의를 느끼고 인생은 의미가 없지만 그 의미 없는 인생을 긍정하고 성실하게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내일 고향에 가서 밤이래도 새우려면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여겠다.
x월 x일
[도전 주부가요스타] 연말 결선을 텔레비젼으로 보면서 노래도 잘하고 잘생긴 여자도 많다고 느껴본다.
물론 화장술이 더 예쁘게 보이도록 했겠지만.
대상을 받은 여자가 천호동이라던가, 내 처가집도 천호동이기에 아무 뜻없이 - 솔직히 조금은 아내를
갈구어 보려는 심사도 있었다. - 누구는 장가를 잘 가서 하와이로 여행을 가고 푸짐한 상품도 받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노래를 시켜보고 결혼하는 건데... 그 당시는 노래방도 없었기에...
그런데 그 말이 아내에게 몹시 거슬렸나보다.
슬쩍 나를 쳐다보더니 침대에 가서 눕고는 밥을 차려 줄 생각을 않는다.
방송국도 어지간히 할 일이 없는지 가정주부들 노래자랑이나 시키고..
더구나 못 볼 것은 노래 잘하는 아내를 가진 것은 좋다지만 자기 마누라 앞에 나가서 노래 하는데
방청석에 앉아 황소 침 흘리듯 입 벌리고 해해! 좋아하는 남편들 꼬락서니라니...괜히 부아가 난다.
밥 좀 먹자고 아내를 깨우니 아내는 몸이 아파 밥이고 뭐고 귀찮으니 알아서 하란다. 그러고 보니 아내가
감기 걸렸는지 아까 목소리가 변한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무심했나, 그런데다 아내 마음에 상처를 주었으니...
아내는 밥도 안 해주고 노래도 못하는 아내라고 모 방송국 [아침마당]에 신청하란다. 그러면 하와이는
아니더래도 제주도여행은 갈 수 있고 상품도 푸짐하게 탈 수 있다나, 뭐라나. 아마 이상벽씨와 이금희가
진행하는 프로인가 본데 송수식박사와 전원주씨의 해법도 받을 수 있다던가.
어떻게 아내를 달래야 할까. 괜히 주부가요열창인가 무엇 때문에 부부싸움까지 하게 되었으니
난감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어쩌면 좋을까.
2002. 12. 28. - 운 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