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향 치
뜰에는 엊그제 내린 비바람으로 떨어진 낙엽의 무리가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그저 정처 없이 바람에 떠돌다가 각자 흩어지는 낙엽을 보노라니 웬지 쓸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문득 나는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 운명일까 하는 상념에 젖어 본다.
내 젊은 날, 군에 입대해서 훈련을 받을 때 독도법 시간이 일주일이나 되었던 것 같다.
지도에서 좌표 찾는 법과 나침반으로 방향을 찾는 기초교육을 받고는 마지막으로 야외 실제 훈련으로
메세지를 분대별로 부여하여 좌표와 방향을 찾아 서너 군데 중간 지점을 거쳐 최종 목표지점을
찾아가서 그 곳의 표석을 확인하고 복귀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훈련소는 어떤지 잘 모르지만 그 당시 훈련소에는 훈련병들을 따라 다니며 빵을 파는
아줌마들이 있었다. 이름하여 이동주부라고 했던가.
그런데 우리 분대가 중간 목표지점을 찾아갔을 때 다른 분대원들은 아무도 몰랐지만
나는 예리한 눈으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해 냈다. 우리는 능선을 따라 산을 넘고 한참을 찾아 왔는데
우리가 출발할 때 빵을 팔던 젊은 아줌마는 우리 보다 먼저 그 곳에 와서 우리를 기다리며
빵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다들 다음 목표지점을 향해 지도를 펴고 나침반으로 방향을 찾는다고 부산을 떨 때
나는 그 아줌마에게 빵을 사며 슬쩍 물어 보았다.
『아줌마! 이다음은 어디서 빵을 팔 거예요? 내가 빵 많이 팔아 줄테니 우리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지름길을 가르쳐 주세요?』
이렇게 해서 나는 벌써 목표지점을 불법으로 전부 알아버렸던 것이다.
이동주부들은 매일 빵을 팔고 있기에 간첩처럼 훈련병들의 교육스케쥴과 과정을 전부 알고 있었고
야외 훈련에서 훈련병들의 이동경로를 훤히 알고 있었던 것인데 나는 그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분대원들을 선동해서 골치 아프게 헤매지 말고 나만 따라오라며 지름길로 앞장을 서서
고생 않고 목표지점 표석을 확인하고는 나머지 시간은 휴식을 취하게 했다.
그 사건으로 해서 나는 중대에서 확실한 리더십으로 인기를 차지해 구대장도 하고
수료 시에는 학교장상도 수상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후로 매사에 노력 보다는 잔머리나 굴려 통박이나 재고 요령만 늘어 편하게 살려는
나쁜 버릇이 들었던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
군에서 제대하고 H 회사에 입사해서는 쌍문동 연수원에서 신입사원 교육을 받게 됐는데
책도 나오기 전에 시간표를 보니 『독도법』시간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회사에서 산에 전주와 철탑을 세우려면 독도법도 배워야 하나보다 생각하고는
하사관학교 기억이 나서 재밌겠구나 싶어 생활실에 돌아와 들뜬 마음으로 경솔하게
산에 철탑을 세우려면 독도법도 배워야 한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그 때 모두들 의아해 하는 모습으로 수군대는 꼴이라니...
그러나 막상 지도가 아닌 두터운 책을 받고 보니 황당하게도 독도법이 지도를 해독하는
기술이 아닌 도면을 보는 법이라는 뜻이었다.
왜 연수원에서는 책을 『SEQUENCE 보는 법』이라고 하지 않고 『독도법』이라고 해서
나를 개망신 당하게 할까.
그 사건으로 나는 연수원에서 목표와는 달리 반장 한번 못하고 상은 커녕 저조한 성적으로
발령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독도법 시간이 10진수를 2진수로 계산이나 하고
16진수로 환산하는 등 진리치표니 부울대수법칙이니 유접점을 무접점화 한다느니
영 재미없어 무관심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지금도 부울대수 법칙을 잘 이해 못하고
Sequence 보는 법이 서툴러 도면 하나 볼라치면 땀을 뺀다.
그런데 아무리 낯선 초행길이라도 지도를 보면서는 잘 찾아가는데
왜 방향감각은 형편없는 심한 방향치가 되어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시내버스를 반대 방향으로 타서 번번히 다시 내려 길 건너서 기다리다가 다시 타지를 않나.
무역회관이 우측에 보였는데 잠시 후 좌측에서 보이지를 않나 남산타워가 분명히 전면에
뾰족하게 보였는데 한참 가다보면 어느 새 뒤쪽에 불쑥 솟아있어 도대체 남산타워가 어느 방향에
있는 것인가 하고 어리둥절해 한 적도 있고 지하철 환승역에서 번번히 반대 방향으로 가다가 되돌아
온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서 안내표지판을 보고 화살표를 따라 지하철을 기다리지만
아까와 반대 방향인 것만 같아 당황해 본 적이 부지기수다.
특히 거기에 술이라도 한잔 걸친 밤이나 잠이 덜 깬 새벽녘에는 더욱 방향감각이 없어 헷갈린다.
나중에 터득한 일이지만 내가 잘 이용하는 충무로나 창동은 전철에서 내려 나오는 출구에 따라
방향이 바뀐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술에 취해서 지하철을 타고 올 때 캄캄한 지하에서는 못 느꼈다가 갑자기 환한 지상으로 나오고 나면
주위 건물들이 불빛 속에 보이는데, 분명 내 행선지와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것 같아 몇 번이고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봐도 얼떨떨하기는 여전한데 목적지에 내리고 나면 올바른 방향으로
잘 왔다는 것을 알고 안도하곤 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맨 정신으로 과천에서 남태령을 지나 왔는데
분명 조금 전에는 우측 레일로 달려 왔는데 지금은 좌측 레일로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또 방향을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해서 일부러 사당에서 내려 다시 반대로 타고 가봤는데
역시 남태령을 지나서는 또 반대로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할 일없이 다시 돌아오면서 창밖으로
유심히 보니 실제로 남태령을 지나면서 반대로 크로스 되는 것을 확인하고는 내 착각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이 되었었다.
지하철에서 국철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전압이 바뀐다는 사실은 들은 것 같은데
왜 다른 곳과는 달리 남태령에서는 레일이 크로스 되는지 궁금해서 나는 참지 못하고
곧 바로 도시철도공사 관계자에게 무슨 이유로, 왜? 방향치인 나를 자꾸 더 헷갈리게 하느냐고
전화해서 알았지만. 지하철에서 국철로 넘어 가면서 일제시대에 건설한 국철 방향을 따랐다던가.
군대에서는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사회에서도 통하지만 이는 곧 방향을 잘 타야 된다는 말일 것이다.
통치자가 바뀌면 통치자의 통치 방향에 따라 국민들은 일사분란하게 따라야하고
직장인은 상관이 바뀌면 그 상관의 경영철학을 얼른 파악해서 잽싸게 그 방향에 따라
성실히 일해야 출세 할 수 있지 않을까.
더구나 요즘 같은 시대에 그저 무사안일주의로 방향도 모르고 복지부동해서 상관의 눈치나 살피고
타성에 젖어 요령만 피운다면 퇴출되기 십상일 게다.
그래서 요즘 자신을 찍어준 당을 버리고 아무 거리낌 없이 당적을 바꿔 따뜻한 방향으로 찾아가는
철새 정치인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것도 자신의 끝없는 안녕과 출세를 위해서일까.
하긴 시대가 바뀔 때마다 방향을 바꾸어 양지에서 계속 정치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방향감각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훗날 모두 재평가를 받겠지만.
지난 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에서 여당으로 양지를 향해 방향을 바꾼 사람들 중 서너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낙선했는데 지금 또 철새처럼 새로운 등대를 향해 방향을 바꾸는 의원들이 많다.
월드컵 4강 신화를 대선 방향으로 바꾸어 보려던 정몽준의원도 지금에 와서 보면
방향을 잘못 잡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든다.
엊그제는 초등학교 친구인 역학자(나는 그를 도사라고 부른다)를 찾아갔었는데
손님과 도사가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니 진위여부야 나는 모르지만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쏘아 올릴 때도 중간에 방향을 열 번이 넘게 수정해 주어야 정상궤도에 오를 수 있다고 하며
사람의 타고난 운명도 자신의 노력 여하와 마음먹기에 따라 바뀔 수도 있는데 계속 노력해도
무엇 하나 되는 일이 없는 나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그 운명의 방향을
살짝 틀어주어야 하는데 방법이 여러 가지 있다고 했던가. 도사만이 할 수 있는...
북한이 실패했다는 인공위성도 중간에 방향 수정을 안 해서 정상궤도에 오르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 도사는 내게 듣기 좋아라 한 말이겠지만 대기만성이니 초조해 말고 때를 기다리라고 하며
다만 구업(口業)을 조심하라고 했다. 오직 마음먹은 방향을 향해 신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면
반드시 성공하리라며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말 보다는 항상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고방식의 언행으로
일관하라는 부탁과 함께... 내가 언제까지 살려는지 몰라도 아직도 큰 그릇이 안됐다니 한심한 생각이 든다.
하긴 역사에 보면 팔순에 영상(領相)반열에 오른 사람도 있었다지만.
중국 전설상의 임금인 황제가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며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해서
꿈에 천신에게서 비결을 전수 받았다는 - 중국에서도 가장 어렵다는 학문인 『기문둔갑』도
사주와 운세를 말 할 때 방위와 시간을 따져, 보다 정확한 미래를 예측하는 일종의 방위학이고
풍수지리의 명당이라는 곳도 방향을 가장 중요시하여 죽어서도 누울 방향을 정하는 것이고 보면
방향(방위)과 우리 사람의 운명은 뗄라야 뗄 수 없는 불가결의 관계인가 보다.
행복한 사람은 인생을 살다가 뜻하지 않은 일로 직진하지 못하고 빙돌아 우회해 갈 일이 생겼을 때
우회해 가면서 그 우회로에 있는 풍경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방향치가 되어 직진만을 생각하다 막혀서는 다른 방향으로 돌아 갈 줄도 모르고
그저 술이나 마시면 좋아서 허허거리고 옆에 여자가 있으면 더 신이 나서 떠들어 대며
언젠가는 길이 트일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엉뚱한 곳에 정신을 팔고 있으니
지금의 내 모습은 영락없이 모가지가 비틀린 풍뎅이처럼 날아 갈 방향을 잃고
땅바닥에서 날개로 먼지만 풀풀 날리며 빙빙 돌고 있는 풍뎅이 꼴이 아닐런지 모르겠다.
글쎄, 나도 부적을 써가지고 품에 넣고 다니고 굿이라도 해야만 내 운명의 방향이 바뀔까.
그저 답답하고 괴로운 마음에 오늘도 혼자 넋두리 해 본다.
『신이여! 내 운명의 방향은 어느 쪽 입니까? 방향도 못 찾고 헤매는 이 방향치에게
부디 살짝 귀띔이라도 해주시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내가 가야 할 방향으로
올바르게 인도해 주시면 정말로 안 되겠습니까?』
2002. 11. 26. - 운 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