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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追想

운명2 2015. 9. 22. 21:42

                         가을 追想

 나는 코스모스 꽃을 보면 코스모스를 닮은 Y 생각에 가슴이 뛴다.
 목이 가늘고 갸냘프던 Y는 늘 해맑게 웃었다. Y는 코스모스 꽃을 따서 머리에 잘 꽂았으며

물이 가득 찬 포화상태의 꽃봉오리를 따서 서로 얼굴에 대고 손으로 누르면 차콤한 감촉이

얼굴에 맺히곤 했다.
 
 어쩌다 기차를 타고 시골에 가는 길이면 철로 변에 코스모스가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환하게 반길 때 나는 Y를 연상해 내곤 반갑다 못해 슬프기까지 했다.

사루비아 꽃은 너무 붉어서 슬프다던 Y는 속리산 오리숲을 거닐며 붉게 물든 단풍을 보고 나도 모르게

 '야!' 하고 감탄사를 연발했을 때, 심각한 얼굴로 운명의 여신에게 도전하고 반항해서 끝까지

투쟁하다가 결국 피를 토하고 죽어가며 머지않아 낙엽이 되어 떨어져야 한다는 마지막 경종인

단풍을 보고 조의를 표하기는커녕 놀부의 후예처럼 박수를 친다고 힐난을 했었다.
 '붉은 것이 피라면 노란 단풍은 그럼 뭐니?'
 '노란 것은 엽록소가 싸우다 죽은 고름이야!'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또 「구르몽」을 미워한다는 Y는 떨어진 낙엽의 무리가 방향을 잃고 헤매던 대전 보문산 공원에서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시체(낙엽)가 애처롭다고 맨땅만을 골라 밟으며 올라가던 기억도 새롭다.

그 때 나는 ‘생은 죽음에서 싹튼다.’는 말을 왜 못했을까. 한 알의 밀알이 죽어 싹을 티우고 낙엽이 썩어

거름이 되고 이듬해 다시 신록을 장만하듯......
 야외 음악당 앞에서 Y가 느닷없이 내게 '너 날 사랑하니?' 하고 물었을 때

나는 응당 죽도록 사랑한다고 해도 모자랐을 텐데 뜻밖에도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미쳤니?' 였었다. 순간 뭐가 잘못됐다는 생각과 함께 후회해 보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돼버린 후였다.
지금 같으면 속으로는 미워해도 겉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고  

'미쳤니?'라고 말한 뒤에도 얼마든지 무마시킬 수 있으련만 그때의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지금까지 누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본적이 없고

「사랑 한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제일로 하기 힘든 말인 줄로 안다.
 
 그 후로 나는 Y와 소원해졌고 한 때 내가 계룡산 기도원에 있을 때

그곳에는 나보다 서너 살 연상인 예쁜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가끔 허연 살을 들어내 놓고

히히덕거리는가 하면 머리에 꽃을 꽂고 곱게 치장하고는 아무도 몰래 화려한 무단외출을

감행하고는 해서 기도원 사람들을 당혹하게 만들곤 했다.
 하루는 내가 멀리 연산 장터에서 그녀를 찾아 데리고 오는데 서너 명의 노파들이 모여 앉아

우리를 보고는 '사내에 미친 기집은 머리에 꽃을 꽂기 전에 고쳐야 하는데 이젠 틀렸군, 쯧쯧쯧......'
 그 순간 나는 그녀를 슬그머니 놓아버렸다. 내 손에서 빠져나간 그녀는 나풀나풀 사라졌는데,

머리에 꽂은 코스모스 꽃을 보고 문득 그 동안 까마득히 잊었던 Y를 생각해 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당시 Y는 벌써 기러기가 되어 내 머리 위를 날아갔었지만,

Y는 죽으면 기러기가 되겠다고 했었으니까.
 
 어릴 적 가을 들판에 나가서는 불장난을 했다.
 낙엽을 긁어모아 밤을 구워먹고 콩서리를 입이 까맣게 되도록 해 먹었으며 손에서는 단내가 났지만

마냥 즐거웠으며 마지막 불을 끌 때는 우리는 둥그렇게 모여 서서 서로 힘자랑을 하면서 오줌발로

불을 껐다.
 그런 날 밤에는 예외 없이 꿈속에서도 시원하게 오줌을 누웠는데 뜨끈해지는 감촉에 아! 또 쌌구나!

했지만 이미 늦었고 요 위에는 제주도가 빠진 우리나라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내가 군 생활을 하던 군부대는 포플라 나무가 무성했다. 가을이면 떨어지는 낙엽에 골치가

아플 정도여서 나는 병력을 동원해서 부대장실 앞을 매 시간마다 쓸어댔다.
 그런데 어느 날 부대장이 내게 하는 말씀이 서울서는 낙엽 밟아 보기도 힘들텐데 구태여 쓸 필요 없이

우리도 낙엽을 밟아보며 가을을 만끽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핏대 (비위 맞추기가 까다로와 느닷없이 아무것이나 집어던지며 소리치는 부대장의별명)의

어디에서 저런 「구르몽」같은 감상이 나올까 하고 실소를 금치 못했지만 좌우지간 쓸지 않아서

편하게 되었다 싶었는데, 위병소에서 「충성!」이란 구호가 크게 들리는 동시 쏜살같이 달려오는

1호차의 뒤를 따라 흩어져 날리는 낙엽과 끝까지 때굴때굴 구르며 찦차를 쫓아가다가는 나뒹굴어지는

낙엽이 보기에도 안쓰러워 내 마음은 한없이 비틀리곤 했었다.
 
 지금도 나는 낙엽을 쓸 때면 Y를 생각한다.
이제 낙엽이 하나 둘 떨어져 보도 위에 쌓이고, 누군가의 구둣발에 밝혀 부서져 버릴 때면,

내가 사랑했던 Y도 기러기가 되어 내 곁으로 날아올런지..... 

                                                                                                           - 운 명 -

                                                           1983. 10.

 

* 이 글은  SBS 라디오 손숙.배기완의 생방송에 소개되어

 즉석 전화 인터뷰도 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