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과 빨갱이
국가보안법은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함을 목적으로 제정된 법률인데, 5공 때 반공법이 포함되면서
민주화 과정 중 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구속되고 투옥되면서 사상, 언론자유를 속박하는 법률로
간주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88년 노태우 대통령이 남북교류를 촉구하는 7.7 선언을
발표하였고, 90년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면서 국보법이 유명무실화되어
그 존재의의에 의문을 제기하여 국보법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나 보수 세력들은
국보법으로 처벌되는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현재의 국보법으로 자유를 박탈당할 일도 없는데,
그나마 국보법이 있기 때문에 체제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국보법이 폐지되면 간첩이
날뛰고 80년 주사파들이나 386 출신 의원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되어 더 설치고 김정일
북한체제에 동조하는 친북사상으로 사회정체성이 우려되어 국보법 폐지에 기를 쓰고
반대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국보법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평생 남을 속이거나 해를 끼치지 않고,
남과 싸우거나 죄지을 일을 하지 않아 과속 단속의 무인카메라와 카파라치한테 걸려 경찰서
민원 봉사실에는 두어 번 찾아간 경력은 있지만 그 밖에 과거 통행금지에도 한 번 걸려본 적도 없고,
경찰에 끌려가거나 검찰에 불려가는 일 없이 모범적으로 살았기에 국보법 폐지나 폐지 반대에도
별 관심도 없었던 차, 지난 번 아내로부터 국보법에 대한 강의를 느닷없이 받고 적어 본 것이다.
10월은 행사와 모임이 많고 여행을 좋아하다보니, 여기 저기 가을 단풍여행을 자주 하게 되어서
거의 한 달 만에 주중에 서울 집을 가게 되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내는 필요 이상으로 반기면서 아이들 보는 앞에서 손이라도 잡아보자며
손을 어루만져 나는 쑥스럽기만 한데, 아이들도 역겹다는 표정으로 윽, 윽! 소리를 내기에 이르렀고...
저녁상을 차리거나 먹으면서도 아내는 왠지 상기된 얼굴에 칼라플한 눈동자로 연신 기분이 좋아보여서
나는 속으로 그동안 밀린 숙제(?)를 한꺼번에 하려면 큰일이구나 싶어 은근히 걱정이 앞섰다.
숙제에 미리 겁을 먹으면 마누라 샤워 소리에도 겁이 덜컥 나서 심인성으로 더 고개가 숙여진다고
하더니만 에고, 정말 걱정된다 싶었다.
저녁을 먹고 정력에 좋다는 싱싱한 굴을 안주로 복분자 술도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막상 아내는 평소와 달리 완전무장을 하고 자리에 눕는 것이 아니가.
그리고는 몹시 미안해하면서...
-오늘 빨갱이가 먼저 쳐들어 왔으니 오늘은 조용히 주무세요.
하는 것이 아닌가. 엥? 속으로는 안도의 숨을 내 쉬면서 한 편 서운하고 나 보다 먼저 쳐들어간
빨갱이가 괘씸해서
-아니, 빨갱이가 쳐들어 왔으면 미리 알려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참내, 당신도. 지금 국보법도 폐지되어 불고지죄도 없어진다는 것 몰라요?
-뭐야?
-불고지죄도 없다는데 굳이 미리 신고할 필요가 있을까요? 신고하면 당신은 빨갱이 핑계로 집에
또 안 올 텐데....
-하하하, 국보법이 그래서 폐지되면 안되겠구만.
-어차피 있으나마나한 법인데 뭘.
-아하, 빨갱이가 우리 집에 쳐들어오면 빨갱이 없는 곳으로 피해서 마음 편히 회포를 풀어도
된다는 말인가?
-그래서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해 형사소송법으로 대체입법을 한다자너요.
-으흥!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간통죄도 살아있고....
-이 사람아, 간통죄는 막판에 갈라설 때, 써 먹는 법이야.
-법을 어기면 당연히 처벌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빨갱이에 대해 불고지한 죄는 간통죄도 성립 안 될걸.
-그래서 어쩌자는 거여요? 신고안한 죄를 묻겠다?
-당연하지! (그 어떤 T.V 오락프로 버전)
-어차피 획일적인 한 색깔의 사회보다 좌파, 우파 공존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고 그
나마 아직까지 빨갱이가 나를 넘보고 월례행사로 쳐들어온다는 사실은 내가 아직 건강하고
젊다는 증거 아닐까요?
-말은 잘하네. 당신도 정말 학생 때는 운동권이었지?
-왜 갑자기 운동권이 나와요?
-사회주의 사상은 전 세계적으로도 소멸되어 가는데 우리는....
-이봐요? 빨갱이가 고정간첩으로 계속 기생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물러 날 텐데... 뭘 반드시 신고해야 한다는 말이에요?
-이 사람아, 그래도 그렇치? 오랜만에 오는 사람한테는 미리 신고해야 하는 것 아녀?
-빨갱이가 쳐들어 왔을 때는 건강을 위해 굳이 부딪치지 말고 잠시 피하라는....
다 당신 건강을 위한 하늘의 뜻이랍니다.
-하늘 뜻 좋아하네. 별걸 다 하늘한테 갔다 붙이네.
-가던 날이 장날이라지만 가다보니 뜻밖에 빨간 신호등에 길이 막혀 파장이 될 수도 있는 법.
무릇 사람 사는 것이 그럴 수도 있는 터. 이제 나도 당신 마음 알았으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말아요.
미안해요.
-그런 거야? 맞는 거야? (이것도 어느 T.V 웃찾사 프로 버전)
-하하하하. 쌩뚱 맞기는...
나는 때 아닌 국보법에 대해서 아내에게 교육을 받고 그 국보법이 폐지해야 좋은 것인지,
유명무실 그대로 두었다가 더 시간이 흘러 자연 소멸되는 것이 좋은지. 아님, 지금처럼 경제가
불황일 때는 경제부터 챙기고 분위기가 반전되고 국민여론이 우호적일 때, 폐지를 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국보법 논쟁이 한창이어도 별 관심 없다가 갑자기 국보법에 대해
오랜 시간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아내는 어느 새 잠이 들었는지 조용한데.
나는 밤새 혼자서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밤을 하얗게 밝혔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빨갱이에 대한 불고지죄는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을까.
2004. 12. 01. -운명이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