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대 이야기
지하철 화장실 앞에서 청소하는 아줌마가 빨간 고무장갑 낀 손으로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젊은 아가씨를 불러 세우고 야단을 친다.
화장실이 쓰레기장이냐고... 왜 여기다 버리고 가느냐.
청소하는 애로사항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닦달을 할까
싶은 것이 겸연쩍어 하는 아가씨가 안쓰러웠다. 그리고 돌아서면서
“터졌으면 잘 처리해서 지네 집 쓰레기통에다 버려야지.” 하는 것이다.
청소 아줌마는 Profiler(범죄 심리 분석관)처럼 저 아가씨가 생리 한다는
것을 어찌 알았으며, 틀림없이 여기다 버릴 것이라는 것을 어찌 알았을까.
지하철에서 그 아가씨는 하필 내 앞에 앉았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창피한 듯 고개를 숙였고, 나도 미안해서 눈을 감고 자는 척 했다.
예전에 T.V드라마에서 남자 직원이 커피를 책상에 쏟자, 얼른 서랍에서
생리대를 꺼내 쓱 흡수 시키는 것을 본적이 있다.
사무실 직원들도 전부 놀라서 쳐다보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한
그 행동에 생리대가 저렇게도 유용하게 쓰이는구나 하고,
나도 웃었던 적이 있었다.
군에 있을 때, 신병 놈한테 주말 마다 세련된 서울 여자가 면회를 오는데,
한 여자가 아니고 여러 여자인 것을 보고 부럽기도 하거니와
나도 뭐 좀 배워볼까 하고, 여자한테 선물하려면 뭐가 좋으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녀석은 의뭉스럽게도
“자주 만나는 사이면, 여자의 생리 주기를 알 수 있잖아요.
그럴 때 생리대를 선물하면 아주 좋아할 것입니다.
어찌 내가 생리대가 필요한지 알았냐고 의아해 하면서...
군바리가 비싼 거 선물할 수는 없고, 생리대는 무척 싸거든요.”
그래서 나도 펜팔 하던 여자한테 생리대를 선물하기 위해
큰 맘 먹고 약국에서 사려는데, 정말 쪽 팔리기도 했다.
몇 번이고 문 앞에서 망설이다가 포기하고,
술 취한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약국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생리대를 찾는 나를 보고 여자 약사는 이상한 듯 쳐다보더니,
사이즈를 물었던 것 같다. 생리대도 사이즈가 있고, 큰 것이 있고
작은 것이 있었든가 본데, 나는 얼른 보통이라고 했던가,
아님 중간이라고 했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요즘은 생리대가 티브이 광고도 하지만 그 당시는 광고도 하기 전이었고.
지금은 생리대가 비닐포장이 되어 나오지만, 그 당시는 크리넥스 통처럼
종이박스에 포장되어 나왔는데, 생리대가 그렇게 가벼운지 처음 알았다.
담배 한 보루 무게만도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직접 전해줄 수도 없고, 곱게 포장해서 우편으로 보냈는데,
포장에 비해 너무 가벼워서 금방 알아차릴 것 같기도 했는데...
그 여자한테 온 답은, 가벼워서 무엇일까 호기심으로 조심스럽게 뜯어보고
깜짝 놀라서 누가 볼세라 얼른 장롱에 숨겼다던가.
그런데 얼굴이 화끈거려서 혼났다고 하면서, 유용하게 쓰겠다고
고마운 인사를 잊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다시 데이트하는 여자가 생겼을 때,
이제는 가벼운 생리대를 무겁게 포장하기 위해, 두껍고 무거운 엘레강스 잡지를
생리대 박스에 맞게 도루코 칼로 반듯하게 잘라서 밑에 깔고 포장을 하니
조금은 무게가 나가서 생리대가 아닌 것처럼 예쁜 선물답게 포장하는
재주도 부릴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뻔뻔해져서 약국에서 생리대 사기보다는 포장하는 것이
더 어려워서 땀을 흘렸던 것 같다.
하지만 여자가 언제 생리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고, 그 포장된 생리대를
전해주면서 반드시 집에 가서 뜯어보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는데...
그 다음 그 여자의 답은
“싱겁긴. 뭐여, 남자가 품위 없이 생리대를 사고 말이야. 앞으로 그런 짓
하지 말아요.”
“아니야. 우리 여직원 시켜서 산거야.” 얼렁뚱땅 변명을 했지만.
어찌 내가 생리대가 필요한지 알았냐면서 호들갑을 떨며 고맙다고
좋아할 줄 알았는데, 도리어 핀잔을 들었으니 크나큰 실망이었다.
어쩌면 그 여자가 나한테 실망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자주 데이트를 해보니 이제야 여자의 생리 기간을
조금은 알게 됐고, 생리기간에는 괜히 별 일 아닌 것 가지고도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때는 눈치를 슬슬 보게도 됐고, 되도록이면 피했다.
그렇다고 생리대를 선물했다가는 전에 어느 여자처럼 크게 화를 내고,
도리어 역효과로 떠나갈 것만 같았기에 조심하는 수밖에....
그런데 언젠가 영화를 보기위해 서울극장 안 매표소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시간이 임박해서 헐레벌떡 도착해서는
“아휴, 큰일 났네. 시간이 촉박해서 생리대를 못 사고 왔는데,
조금 비치는 것 같은데, 안되겠어요. 내가 얼른 사올 테니 기다려요.”
“내가 갈게.”
“아녀요. 빨리 표나 끊어요.”
나는 상영시간은 다가오고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그 녀는 한참 후 나타나서
부리나케 화장실에 갔다 와서는
“ 휴우. 이제 살았네. 빨리 들어가요. 늦었어요.”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중국의 주윤발과 여배우 공리가 나오는 영화를 보면서,
나는 영화보다도 공리보다도 더 예쁜 그녀의 솔직하고, 부끄러움도 없이
나한테 부담도 안 느끼고, 결혼한 남편처럼 대하는 그녀가 더 사랑스러웠다.
이제 우리는 부부나 다름없다는 믿음과 신뢰의 생각으로...
장예모의 영화가 늘 그렇듯이 화려한 색상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으로
화면은 온통 시뻘건 피로 물들이는데, 영화를 보면서 문득 생각이 나서
내가 귓속말로
“이제는 안 비치는 거야?” 그랬더니 나를 향해 눈을 힐끔 째려보고는
슬쩍 미소 지으며 내 손을 꼭 잡아주던 그 사랑스런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영화를 보고나서 파전에 막걸리를 마시며,
“그러잖아도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술을 마시니 얼굴이 더 빨갛지?”
여자는 생리기간에 더 얌전하고 복사꽃잎처럼 화사하게 더 예뻐 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회상해 보건데, 생리대는 생리대일 뿐.
영원한 사랑은 없듯이, 그녀들과의 사랑은 가슴에 붉은 상처만 안고,
그녀들과의 아름답던 사랑의 추억은 저기 김포 쓰레기매립지의 땅 속 깊숙이
검은 비닐봉지에 쌓여 묻혀서, 영원히 썩지 않는 생리대처럼
그들과 나만의 결코 향기롭지도, 그렇다고 악취도 아닌
우리들의 체취로 영원히 남아있으리라.
주례사 앞에서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변치 말고 살겠다고 서약하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쉽게 이혼하고 헤어지는 마당에, 그까짓 연애기간에 한
사랑의 맹세는 날개를 접어 돌돌 말아 까만 비닐봉지에 쌓여서 버려지는
일회용 생리대만도 못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훗날, 아주 먼 훗날. 우리들 다음 생명체들이 문화재를 발굴하듯,
땅속 쓰레기더미에서 생리대를 발견하고는 유전자 감식으로
주인공을 밝혀내고, 소설가나 시나리오 작가는 신화나 전설처럼
우리들 사랑을 그럴듯하게 재현할 수 있을까.
그 신병 놈의 말만 철썩 같이 믿었는데, 어쨌든 생리대하고 나하고는
좋지 않은 징크스가 분명 존재하나보다.
그녀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나도 까마득히 잊혀 진 사람도 있고,
갑자기 소식도 없이 사라진 사람도 있지만...
혹시, 한 달에 한 번 생리대를 보면서 문득문득 내 생각을 하지는 않을까.
지하철에서 눈을 감으니 생리대에 스며드는 그 커피처럼, 걷잡을 수 없이
그 붉은 상처처럼 아픈 옛 추억이 왈칵 눈물처럼 쏟아졌다.
어제 좀 늦게 퇴근을 해서 집으로 가는데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 나 성당인데 좀 늦을 것 같은데. 끝나고 가서 저녁 차려도 되지요?
배고프면 빵이라도 우선 먹던지...”
“알았어.”
짜증스럽게 대답하고 집에 들어가니, 아내는 급히 나간 듯 식탁 위에
뭔가 들어있는 까만 비닐봉지가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어,
난 빵인지 알고 비닐봉지를 열어보는데,
“ 헉!, 이런 닝기리. 드레곤 힐! 쓰빠!”
그 것은 한 뭉치 생리대였고,
나는 나도 모르게 주방 구석으로 패대기치듯 던져버렸다.
2009. 11. 26. - 운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