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여자와 옆동 여자
우리 옆집 여자는 언제나 화장을 진하게 하고 항시 종종 걸음으로 다닌다.
낮이나 밤이나 차분하게 인사하는 법 없이 뭣이 그리 바쁜지 인사만 하고는 부지런히 나다닌다.
그다지 미인은 아니지만 늘 진하게 화장한 얼굴이 밉지만은 않고, 체격이
작아서 오히려 귀여운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 옷이 날개라고 입고 다니는
패션을 보면 도회적이고 부티를 풍기기도 한다.
아내는 나와 결혼한 후로 하이힐을 한 번도 신어 본 일이 없지만,
옆집 여자는 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다닌다. 연예인이 청담동 미용실에 가서 메이컵하고 출근하듯이
하여간 멋쟁이다. 그래서 아내와 자연스럽게 비교도 된다. 물론 나이 차이가 있긴 하지만.
아내와는 같은 교회에 다녀서 서로 잘 알고 지내기에 가끔 음식도 나누어
먹는 것 같았고. 과일 박스가 택배나 마트에서 배달이 오면 과일도 우리한테
조금 전달해 주기도 하는데, 아내는 부담스러워했다. 얻어먹기만 할 수 없으니 우리도 주어야하기
때문 일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 부부와 밤늦게 당현천에서 산책을 하다가 만났는데,
그 때도 여자는 화장을 하고 있었고 서로 인사를 하고 그들이 지나간 뒤,
아내는
“저 여자는 화장 안 한, 맨 얼굴(생얼)을 도대체 볼 수가 없네. 언제 화장을 하고 언제 지우는 것인지...”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새벽에 내가 신문을 가지러 나갔을 때.
마침 옆집 여자는 운동을 하러 헬스장에 나가는 것 같았는데,
그 때도 화장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남편이 항문질환에 대해서는 실력을 알아주는 유명한 외과의사라던데
지하철역 근처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점심은 꼭 집에 와서 먹고 가고 음식쓰레기는 물론 재활용
쓰레기도 항시 남편이 분리해 버리는 것을 보면 애처가 같은데, 담배는 늘 아파트 계단에서 피우고 창문에
재떨이까지 있는 것으로 보면 애처가가 아니라 공처가 같기도 한데, 나 같으면 담배를
끊고 말지. 한 겨울에도 밖에서 떨면서 담배피지는 않겠다. 병원에서는 어디서 피우는지 몰라도 집에서는
아마도 아내가 무서워 밖에서 피우는 것 아닐까.
우리 애들이 들어오면서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지 마자 계단에서 담배냄새가 난다고 투덜대기도 하거니와
나도 아파트 계단에서 담배 피우는 그가 못마땅하지만 그렇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런데 아내는 쓰레기 버리는 날마다 옆집 남편을 본받으라고 잔소리다.
그 옆집 남편 때문에 결국 나도 쓰레기 분리 배출은 내 담당이 되었지만,
아직 음식 쓰레기 배출은 아내 몫이다. 남자가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배출 전자카드를 찍고 음식물을
버리는 것은 아직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그마한 남자의 자존심은 지켜야 하겠기에...
옆집 여자가 상냥하게 인사성이 밝은데 비해 그 집 자녀들은 인사성이 없다.
삼수하는 아들도 아버지 닮아서 내 보는 앞에서도 담배를 물고 다니지만
나한테 인사하는 법이 없다. 딸도 엄마의 판박이처럼 작지만 하얀 살결에
엄마처럼 이쁘장한데, 하얀 푸들만 끼고 다니지 엄마와 달리 인사는 전혀
할 줄 모른다. 대학 입시에 피아노를 택했는지, 요즘 밤늦도록 피아노를
치기에 층간 소음으로 민원이 제기되어 방음벽 공사를 두 번이나 했는데도
아랫집과는 사이가 안 좋은 가 보다. 밖에서 아내한테 우리 집도 피아노
소리가 들리느냐고 물으면서 엄청 돈을 들여 공사했는데도 소음이 난다고
하니 속상해 죽겠다고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었던 적도 있다한다.
나는 아내한테 그 버릇없는 아들이 요즘 안 보인다고 했더니 군대 갔단다.
옆집 남편이 여자에게 절절매는 것으로 보아 여자가 미인은 아니더라도
처갓집 재산이 많아 병원도 개업해 주었을 거라고 믿고 싶은데,
아내의 말을 빌리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고 한다.
어찌 되었던 그래서 여자는 생얼을 주위에 보여주지 않으려고 늘 화장을
하고 있고...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잎처럼, 늘 남편보다 늦게
자고, 남편보다 일찍 일어나서 남편도 그 아내의 진짜 생얼을 한 번도 본적
없는 것은 아닐까.
나이 들어 여자의 화장도 기본 예의라지만, 옆집 여자는 너무 화장을 고집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무언가 얼굴에 감추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닌지 호기심에 엘리베이터에 같이 탔을 때는 곁눈질로 슬쩍
훔쳐보고 또 옆면 거울을 통해 도둑질하는 마음으로 신경을 쓰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찰색을 했지만,
그냥 피부가 곱고 뽀얀 살결이라서 화장을 안 해도 예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언제나 화장을
해서 화사한 얼굴로 급하게 나에게 인사하며 화장품 냄새만 풍기며 종종 걸음으로 멀어져가는 옆집 여자가
그래도 기분을 업 시켜주어 싫지만은 않아서, 가끔 또딱또딱 하이힐 소리가 들리면 나는 우리집 현관 모니터를 잽싸게 켜고 몰래 훔쳐보기도 한다.
내가 밤늦게 귀가하다보면 우리 아파트 입구의 호프집 앞에 거리의 한쪽을 전부 점령하고 있는 야외 하얀
테이블, 빨간 의자에 앉아 둘이서 호프를 마시는 것도 종종 볼 수 있는데, 그때에도 나와 눈이 마주치면 꼭
밝게 인사를 해서 내가 미안할 정도이다.
하지만 그 남편은 내가 무슨 죄 지은 일도 없는데, 아무 이유 없이 내가 먼저 괜스레 피하게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옆집 여자와 달리 조금 거만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지 그 귀여운 옆집 여자의
남편이라는 이유 때문일까. 아니면 모니터로 그의 부인을 훔쳐본 양심의 가책이랄까.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얼마 전 불암산 등산을 하는데, 헬기장 거의 다가서 길가 바위에 한 여자가 힘들었는지 지나가는 사람들
신경도 안 쓰고 푹 퍼져서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길에서 조금 비켜 앉았으면 좋으련만 하는 마음으로
유심히 쳐다보았었다. 여자는 화장 안한 얼굴이 창백해 보이기도 해서 내가 ‘괜찮으세요?’
물어보기 까지 했다.
나는 헬기장에서 앉아서 쉬다가 천병약수터로 혼자 하산하는 길에 갑자기
바위가 나타나고 길을 잘못든 거 같아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뒤에서 아까
그 화장 안한 여자가 내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괜히 반가움에 그 여자 뒤를 따라가며 이 길은 초행이라 길을 몰라서
머뭇거렸다고 하니 그 여자는 나만 따라오면 된다고 하며 자기는 이 길을
잘 안다고 했다. 그렇게 대화가 시작돼서 교회에서 낮에 칼국수를 먹고 커피를 4잔이나 마셨더니 속이
안 좋았는지 현기증이 나서 아까 길가 바위에 걸터앉아 물을 마시고 쉬었노라며, 내가 묻지도 않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얼핏 얼핏 보니 화장을 전혀 안한 얼굴이었지만. 그런대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찰색도
깨끗하게 보였다. 더구나 순수한 차림에 참하고 선한 인상이었다. 적당한 키에 날씬하지는 않았지만 그 나이
누구나 그렇듯이 뱃살이 좀 보이는데, 그렇다고 퉁퉁한 것도 아니고, 내 아내 보다는 대여섯 살 적어 보여서
속으로 아내도 저 나이 때는 더 예뻤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는데, 누가 묻기나 한 것처럼 자기는 등산할 때
화장을 안 한다고 하며, 화장 진하게 하고 산에 가는 여자들은 이해가 안 간다던가.
그 여자는 자기가 화장안한 것에 대한 나름대로 변명을 하는 것 같았고,
자기도 화장하면 달라 보일 것이라는 인식을 나한테 심어주는 것 같게도
들렸다. 혹시 화장을 안 해서 내가 촌스럽게 생각하거나 무시하지 말라는
일종의 자존심이나 부탁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앉자마자 화장하는 젊은 여자들은 예의를 떠나 꼴불견이라고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들 상관없이 쳐다보거나 말거나 대담하게 작은 거울을 들고 입술을
움직여가며 눈을 깜빡거리고 하나하나 변장해 가는데 서 있는 내가 눈을 줄 곳이 없어 당황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정말 못마땅했었다.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나던지 하면 될 것을, 굳이 지하철의 많은 인파 속에서 해야 한단 말인가. 지하철에서
자리는 없고 목적지는 다가오고 다급했던지
서서 화장 하는 여자도 보았거니와 오후의 지하철에서도 화장하는 여자를 본 적 있기에 아무리 개성시대이고
자기 얼굴 자기가 변장하는데 무슨 상관이냐 하겠느냐 만은, 지하철에서는 다른 사람들 생각도 해야지,
남이야 쳐다보건 말건 대담하고 뱃장 좋게 아니 뻔뻔스럽게 화장을 하는 것은 좀 지나친 것 같기도 했었다.
화제를 바꿔, 등산을 좋아하지만 산악회에서 가는 등산은 아침 일찍 집을 나와야 하기에 그렇고,
또 앞 사람 뒤만 보고 정신없이 따라가야만 하기에 경치를 감상할 여유도 없어서 싫다면서 가끔 이렇게
오후에 혼자 산을 다닌다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하면서 내려오다 보니 그 여자는 우리 옆동 사는 것이었다.
무엇 하나 뚜렷이 내세울 것 없는 미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흠잡을 데도 없는 아주 지극히 평범한 옆동 여자가 괜히 더 반가웠고, 나를 편안하게 해준다는 느낌에 갑자기 어떤 마력에 끌리듯이 호감이 가고 매력이 있어
보였다.
그 여자는 가끔 운동 삼아 불암산을 찾는다며 또 만날 수도 있겠다는 작업성 비슷한 말을 하기에,
나도 화답으로 무슨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아서 마땅한 멋진 말을 궁리하는 중에 우리는 어느 새,
아파트 입구까지 왔고, 때마침 아는 여자를 만났는지 그 여자와 서로 인사를 하고 무슨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고, 나는 뭔가 받을 것이 있거나 내가 줄 것이 있는 것처럼 쭈뼛쭈뼛 하다가
기회를 놓치고, 먼저 간다는 인사만 하고 아쉽게 헤어졌다.
다음에 같이 산에 가자고 하던가. 우리 카페에 가입하라고 하던가, 화장 안한 얼굴이 무척 예쁘다던가,
맥도날드에서 시원한 커피나 한 잔 하고 가자던가. 덕분에 즐겁고 편하게 등산했다는 말도 바보처럼 못하고
안타깝게도 마음에 동요만 일으키고 그렇게 끝났다.
얼마 전에 누군가 도보 길에서 나에게 그랬다. 결정적인 찬스에서 2%가 부족하다고...그래서 맨날 헛물만
켠다고...
그러고 보니 슬프게도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 옆동은 출입구가 우리 동과 방향이 달라서 그 후로 그 여자는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다.
오늘도 진한 화장의 우리 옆집 여자는 보았지만, 옆동 그 여자는 화장을 하면 어떤 모습일까,
화장 안한 얼굴과 어떻게 다를까,
무척 궁금한데도 영영 보이지를 않는다.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혜성처럼 사라졌다고나 할까, 그런데 혜성은 한 번 나타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주기가
제일 빠른 것이 60년이고, 보통은 수 백 년에서 수 천 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내 생애에 다시는 볼 수 없는
혜성이었을까.
염치불구하고 아니 용기를 내어 뻔뻔스럽지만 태연하게 당연한 것처럼 전화번호를 내가 먼저 물어보았어야
했나 보다. 그런데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 만 옹알이 하듯 웅얼거리기만 했지, 입 밖으로는 안 나오는데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아침부터 옆동 출입구에서 하루 종일 마냥 지켜 볼 수도 없고.....
내가 시간 날 때 마다 오후에 불암산을 오르는 진짜 이유를 아내는 모를 것이다.
2017. 6.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