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샤워를 하고나서 반듯이 걸려있는 수건을 본다.
수건에는 수건마다 무슨무슨 기념이라는 글자와 함께 날짜도 쓰여 있다.
현역에 있을 때는 수시로 기념수건이 나왔었다.
수건은 여태 따로 사지 않아도 수건이 부족하지 않아 좋았었다.
명절에는 세수 비누, 샴푸, 치약, 칫솔 같은 세트도 많이 받았었던 것 같은데
퇴직 후에는 해마다 전우회 가을 체육대회 기념 수건을 받은 것 밖에는 없어
아쉽기도 하다.
퇴직하고 나니 하찮은 비누, 치약, 수건 하나에도 좋은 직장을 퇴직하고 백수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해 보며
현역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나는 매일 매일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면서 그 날 수건에 쓰여 있는 것을 확인해 보며
그 때 그 시절 그 날짜로 돌아가 회상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경영성과 목표 달성이라는 수건을 보면서는 그 때 우리 전 사원이 열심히 일했다는 자부심도 느끼고
추계 체육대회 기념을 보면서는 맞아, 그 해 우리 팀이 족구대회 우승을 했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기도 하고
야유회 기념에서는 해 마다 마지막에 상품권 추첨이 있기 마련인데 남들은 그 많은 상품을 다 타 가는데
나는 제일 흔한 식용유나 티슈에도 한 번도 당첨된 적도 없었기에 기대도 안하고 상품에 초연한 척,
몇몇이 둘러않아 끝까지 남은 술을 마시면서도 혹시나 하는 욕심에 사회자가 번호를 호명 할 때 마다 번호가 적힌
작은 쪽지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좀생이 짓을 하는데도 역시나 내 번호는 호명되지 않아 실망을 하던 찰나,
내 번호가 마지막 1등에 당첨되어 술자리도 팽개치고 홍삼세트를 받고 들떴던 기억도 새롭다.
1등 상품을 받고 내가 노래까지 불렀었지.
그런데 그 상품은 며칠 후 누님의 생신잔치에 무얼 선물해야 하나 돈 걱정을 하던 아내가 누님의 선물로 가져가자는
일방적인 제안에 나는 맛도 보지 못했던 생각도 난다.
OO년도 춘계대회 때는 내가 어디서 근무 했더라.
아, 그 때는 그랬었지. 내가 술이 취해 타부서 사람과 심하게 말다툼을 하고
동료들 만류로 끝나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 부끄럽기만 하다.
아마도 성질 급한 내가 먼저 버럭 했을 것이다.
어느 지방의 향우회에서 발전소 방문기념 수건도 보인다.
그 때는 발전소 홍보차원에서 외부 단체의 발전소 방문을 개방했었나보다.
백일잔치나 돌잔치 기념수건도 있다. 사내 젊은 직원의 애가 백일이었고 돌잔치도 거나하게 했었나보다.
OOO여사 칠순잔치라는 기념 수건도 보인다. 칠순날짜를 보니 10년도 더 지났는데 잔치를 해준 아들 이름은 없고
촌스런 옛날식 여자 이름이라서 누군지 전혀 기억이 안 나고 알리도 없다.
그래도 건강하게 지금도 생존해 계실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퇴직 기념 수건에서는 선배님들 이름도 보인다. 퇴직하면서 기념으로 후배들에게 수건을 돌렸나 보다.
가끔 1년에 한두 번 애경사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선배님들 이름도 있고, 자상하고 인품이 높아 늘 덕을 베풀던
그 선배님은 아직도 건강하게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궁금하기만 해서 꼭 한 번이라도 만나보고
싶기도 하다.
생각이 꼬리를 물어 신입사원 시절에 높은 상관이셨던 분들도 연락이 되면 꼭 찾아뵈어야겠다고 다짐해 보면서도 뭐가 그리 바쁜지 마음뿐이고 더구나 코로나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전우회보에 별세 소식을 볼 때는
안타깝기만 하다.
요즘은 시간이 많아서 학교 동문회나 동창회에 자주 나가다 보니 최근의 동창회 기념 수건이 부쩍 자주 보이고
해 마다 송년회 기념 수건도 많이 눈에 띤다.
지나간 시절이 그립고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점점 늙어 간다는 징조이고
지나간 시절이 괴롭고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이미 늙어버린 것이라고 했다.
매일 매일 기념 수건을 보며 지난 시절을 떠올려 보고 그리워하는 것은 나도 분명 늙어가는 것이겠지만
나도 이제 점점 기억력이 떨어져서 내 전화기에 저장된 성함을 보면서 분명 나와 만난 적이 있거나 어떤 식으로든지
관계가 있는 사람일진데 소원했던 탓인지 누군지 전혀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텔레비전이나 흘러간 영화를 보면서 외국의 유명한 배우나 우리나라 탤런트와 가수 이름을 얼른 기억하지 못해서
내 자신에게 짜증내는 일이 잦아지다보니 매일 기념수건을 보며 옛 기억을 잊지 않으려고 기억 게임하듯
부단히 애를 쓰는 것일 지도 모른다.
또 가끔 모임에 나가거나 장례식장이나 결혼식 피로연에서 만나서 서로 아는 척, 수인사는 했지만 상대방 성함이 언뜻 생각나지 않아 어정쩡한 대화를 이어가면서 누구더라 기억회로를 다 들춰내도 쉽게 떠오르지 않아 속으로 성씨부터 비슷비슷한 이름을 다 가져다 붙여 봐도 좀처럼 해결이 안 되는 난제라서 분위기까지 낭패가 된 수치스러운 일을 겪는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일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앞으로 더 나이가 들어 친하게 지내던 가까운 친구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 오고
혹여 치매 증상까지 온다면 정말이지 그 보다 더 절망적이고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만은
그런 끔찍한 생각만 해도 두렵고 괴로워 마음이 아프니 이미 나도 늙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