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봉사활동을 다녀와서
인도네시아 봉사활동을 다녀와서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7시간 만에 자카르타에 도착했다.
하지만 공항에서 어렵게 입국수속을 마치고 검색대를 통과할 때,
우리가 고아원에 기증하려고 가지고 간 사랑의 헌옷은 몽땅 압수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무하마디야 재단과 고아원에 전화를 해서 기증품이라는 사실을 확인 시켜주는 데도,
세관원은 은근히 뒷돈을 부탁하는 눈치던데 아직도 이 나라는 부정부패가 만연한가 보았지만
윤리 차원에서 들어줄 수 없었고, 우리는 밤도 늦었기에 무하마디야 재단 관계자에게
직접 전달하겠다는 말만 믿고 허탈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은 자카르타 시내에 있는 고아원을 탐방했는데, 학교 건물과 같은 동에 사무실이 있고,
학교 뒤편과 연결되어 고아원 시설이 있었는데, 우리의 학교와는 달리 4층 일반 건물이 학교였으며,
운동장도 주차장시설과 같이 좁은 마당이었기에 놀랐으며, 우리네 60년대처럼 우리가 학교 다닐 때에
운동장 입구에서 리어카에 콜라가 가미된 얼음냉수를 팔고, 과일 주스를 팔고,
장난감과 얇은 빵 같은 것을 만들어 파는 것을 보고, 옛 추억을 살려보게도 된다.
고아원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우리 일행 중 미스터 박이라고 소개하니 축구선수 박지성이와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서 박지성이 세계적 스타임을 또 한번 알게 돼서 우리 모두는 웃었다.
그리고 이 고아원에 한국아버지를 둔 여자애가 있는데, 아버지가 사망하는 바람에 고아원에
오게 됐다는 한국계 여자애를 특별히 불러와서 인사를 시키는데, 예쁘게 생겼는데
아버지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공손히 인사하는데 안쓰러움이 더했다.
고아원 시설을 직접 보니 열악해서 식당을 페인트칠하기로 하고 남자 침실의 침대를 수리해주고
화장실 문을 교체해 주기로 했다.
이어서 수업 중인 학교도 방문했는데 선생님이 우리를 위해서인지 고아원출신 손들어보라고 하니,
당당하게 손을 드는데 한 반에 열 명 가까이 되는 것 같았는데, 우리와 문화 차이를 엿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자존심에 숨기거나 그늘져 있을 텐데도 이들은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고
미소 띤 얼굴이었기에...
무하마디야 재단도 방문했는데 공항에서 사랑의 헌옷을 찾아오기 위한 공문을 작성하고
보건사회부에도 협조공문을 발송 했다고 한다.
2일 째는 2개조로 나누어서 우리가 직접 시장에 가서 페인트와 목재, 그리고 작업공구들을 구입해서
본격적으로 작업에 돌입했는데, 더운 날씨에 우리는 땀을 비 오듯 쏟았다.
나는 각목을 톱으로 잘라서 침대 받침대를 만들고, 합판을 재단해서 올리고 두 방 20여개 침대를
도시락을 시켜먹으며 오후 늦도록 작업했다.
한 아이가 옷장에 옷을 걸 데가 없어 그냥 벗어두는 것을 보고, 즉석에서 내가 못을 박아 주었더니
너도 나도 못을 들고 와서는 박아달라고 하는 바람에 10여개 옷장에 전부 못을 박아주기도 했다.
3일 째는 화장실 문을 교체해 주는 작업을 했다.
문짝을 8개 사와서 망가진 문짝을 떼어내고, 새 문을 달아주었는데, 우리의 화장실과 달리 화장실
변기 옆에 커다란 물탱크와 바가지만 있고, 화장지도 없어서 수세식은 수세식인데 전혀 냄새가 없어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왼손으로 처리하고 손을 물로 닦는다고 한다.
기도 시간이 되면 샤워도 전부 그 곳에서 하고 옷을 갈아입고 기도실로 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후 3시에는 사장님과 경영처장님이 오셔서 강당에서 무하마디야 재단 총재와 보건사회부 국장,
고아원 원장이 고아원생들과 같이 자리를 마련하고
사장님이 후원금을 전달하고, 우리가 준비해간 선물 봉지를 고아원생 전부에게 전달하고
우리는 앞에 나가서 우리노래 [사랑으로]노래를 부르고, 통역사가 가사 내용을 전달해주자
우레와 같은 박수도 받았다.
사랑의 헌옷도 이들에게 전달해 주었으면 더 반가워하며 기뻐했을 텐데, 보건사회부 장관이
그 옷은 기증품이라고 전화를 해도 통하지 않고 2달 후에나 찾아가란다고 해서 도와준다는 데도
막무가내인 이 나라의 수준에 화가 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는 고아들이 50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 고아원은 그 중 하나겠지만 그동안 고아원생들과
말은 통하지 않더라도 눈인사로 정이 들었기에 사진촬영에 서로 같이 찍으려고 나서서
우리는 많은 사진도 찍어 주었다.
특히 아버지의 나라 사람들과 아버지 생각 때문인지 끝까지 남아서 인사를 하던
그 학생을 잊을 수가 없고,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어설픈 영어로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서로 통했기에 그들과의 이별이 아쉬웠지만 상투적으로 또 오겠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자카르타는 서울처럼 인구가 천만 가까이 산다고 한다.
도로망이 좋지 않은데다가, 차도 많았지만 오토바이가 더 많았던 것 같았으며 그들이 한데 어울려
곡예처럼 운전하며 다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신호등도 없고, 차선도 없이
서로 부딪칠 듯 끼어들고 빠져 나가는 것을 보니 운전이 예술 같았다.
여기저기 높은 고층 건물은 많았지만, 그 주변은 판자집이나 양철집으로 빈부의 격차가 너무 심했고,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만큼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담배를 연신 피워 대서 공기는
더 탁한 듯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이 타는 차는 전부 일본제이고 옷도 일본제여서 일본이 경제성장한 이유를 알 듯도 하고,
우리가 더 일찍 진출하지 못한 것이 배 아프기도 하다. 몇 년 후에는 저 오토바이들이 전부 차로 바뀔 텐데...
교포식당에서 만난 여사장님은 돈은 벌지만, 늘 그날이 그날처럼 기후변화가 없어서 무료하다고 했던가. 그래서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욕망없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그 것으로 보면 우리나라가 가장 살기 좋은 곳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지금도 그 고아원 아이들의 올망졸망한 눈동자들이 떠오른다.
부디 건강하게 자라서 훌륭한 사회의 일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