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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뿐인 여자

운명2 2014. 1. 21. 12:52

 

                                   하나 뿐 인 여자

                                                          - 류병숙 수필 집 -

 

 

먼저 제목으로 하나 뿐 인 여자를 선정한 이유가 무엇일까? 호기심이 제일 먼저 발동한다.

그러나 하나 뿐인 여자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 줄 알았던 선입견과는 달리 안성 남사당패의 바우덕이

이야기여서 허탈했다.

남자들만의 사당패에 최초로 몸을 던진 뛰어난 미모와 옹골찬 노랫가락으로 또 줄 타는 재주로 많은 남성들을 오금 저리게 했다는 - 또 누더기 같은 삶을 한바탕 굿판으로 날려 버렸다는 바우덕이와 작가의 삶을 유추해 보지만 답이 안 나왔다.

문학 평론가 권대근의 평처럼 하나 뿐 인 여자를 표제로 선택한 작가의 의도를 음미해 보는 것이 쾌미일까? 아마도 바우덕이처럼 홀로서기로 한 시대에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작가의 염원이었을까.

 

 

이 책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로 나누어져 있는데, 계절에 맞는 감성으로 독자들에게 진한 여운을 준다. 작가는 피플 475에도 주옥같은 글을 많이 썼기에 낯설지는 않지만, 작가는 일상에서 만나는 사물과 경험과 여행에서 우리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철학적 사유에서 느끼는 감성을 문장의 구조나 묘사가 이렇게 아름답고 맛깔스런 우리말로 표현할 수가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권대근 평론가는 문학에서 없어서는 안 될 두 가지 정서가 외로움과 사랑이라던데, 비유나 강조 등의 수사법이 다양하게 전달 돼 독자로 하여금 연상과 상상의 세계로 빠지게 하는 마력이 있다.

 

나는 작가를 피플 475 초창기에 몇 번 본적이 있는데, 자상하고 조용한 어조로 밝은 미소와 함께 진솔하게 대화를 하는 것을 보고 평소 존경받는 선생님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었다.

그러나 밝은 표정 속에서도 어딘지 모를 어두운 구석이 순간순간 보이고 고독감이 느껴지면서 때로는 대쪽 같은 성격도 엿보였는데, 피플 475 글을 통해서 미망인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댓글 논쟁을 보면서도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구나 싶었다.

 

 

다시 글로 돌아가서 작가는 목련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는데, 나도 목련에 대한 글을 썼던 적이 있듯이 목련에 대한 아픈 추억이 있어 떨어질 때의 그 지저분함이 떠나간 사람을 연상시키기도 했던 목련.

[복숭아꽃 퍼포먼스]를 읽으면서는 문득 강우식의 ‘그리움’이란 시가 생각났다. 봄이면/누군가 이 몸 사 가시어/ 복사꽃잎 하나로/떨어지고 싶다던/여자 되어 떠오른다.

나도 가 보았던 예천 삼강주막의 [외상장부]에서는 신문을 통해서 주인이 주인만이 아는 방법으로 벽에 외상값을 표시했다는 것을 보았지만, 내가 미쳐 느끼지도 생각지도 못했던 그 옛날의 주막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떠오르게 만드는 상상력. [개구리 울음소리]를 보면서는 힘없이 웃어보며 지난 날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러워서 돌을 던졌던 내가 부끄럽기도 하다.

언젠가 양평 한화 콘도에서 1박2일 워크샵을 하면서 새벽에 숲속 산책길을 마지못해 나선 일이 있는데, 거미줄 은사에 땀방울이 빛난다는 [안개 속의 명상]을 떠 올리고 하찮은 거미줄에서도 작가는 저런 감성을 느꼈구나 싶어 감탄한 적도 있다.

여든을 바라보는 작가의 부모님이 아직 생존해 계신 것을 보면 아마도 작가의 부모님은 일찍 결혼을 했나 보다. 작가도 적지 않은 나이지만 이미 손자를 보았을 테니...

약골인 몸으로 딸만 낳으신 어머니의 한도 있을 법하지만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지금은 누구 보다 더 효도를 받고 살지 않나 싶기도 하다. 세상이 불공평한 것이 작가는 아들만 둘이라고 했던가.

 

작가는 남편을 여의고 남편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간절함으로 점철된 힘든 삶을 글로 표현하는데 그 안쓰러움이 독자로 하여금 더 마음 아프게 한다.

오늘도/나 없는 벤치에/그대 수줍게 앉았다 가고/목 늘여 기다린 창가엔/그리움이 차양을 내린다./우린 어쩌다/한 목소리로 노래하지 못하고/서로의 빈 뜰에서/혼자 흐느끼는가.[혼자 부르는 듀엣]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홀로 가는 운명이었기에, 새로운 공부에 계속 도전하고 새로운 세계로 많은 여행을 다닐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세상을 살면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직진하지 못하고 우회해서 가야할 일이 생겼을 때, 조금은 멀고 시간이 걸려 힘들지만, 천천히 돌아가면서 그 주위의 풍경을 감상 할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 행복이 무엇인지 안다고 했지 않은가.

남편과 운동하던 학교 운동장에서 포레스토 검프처럼 혼자 뛰면서도 다시금 그 사람을 생각해보고 투병하던 남편에게 온갖 치료법을 동원해 간병하던 애절한 마음. 하지만 조금 빠르고 늦을 뿐이지 우리는 누구나 결국은 혼자 달리는 인생이 아니던가. 너무 슬퍼하지 마시라.

청량사 스님의 외로움을 엿보게 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청량사를 갔었지만, 나는 김생굴을 보면서 옛 사람이지만 여기서 무척 외로웠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작가는 청량사에서 1박하면서 스님과 많은 대화도 했었나 보다. 산 속에서 기도 정진하는 스님이나 세속에서 생존 경쟁하는 갑남을녀 모두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존재 아닐까. 누군가 외로우니까 사람이라 했듯이...

그런데 스님이 말했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이 바로 지금. 이 자리가 아닐까 싶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기에 후회 없이 살아야 할 것이고.

지금 이 자리를 사랑하면서 자신을 바쳐 누군가를, 아니 무엇인가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했다. 주로 혼자 사는 여자들이 개나 고양이를 반려동물로 키우며 사랑하듯. 그래서 작가는 네덜란드 튜울립을 입양한 딸처럼 사랑하며 키우는 것일까.

[레떼의 서정]에서는 그리움이 절정을 이루는데, 꿈에라도 나타나는 것은 다행 아닐까 싶다. 조선시대 어느 선비의 시조는 사랑에 더 아파하니까.

사랑 거짓말이 날 사랑 거짓말이

꿈에 보인단 말 더 더욱 거짓말이

나처럼 잠 못 드는데 어느 꿈에 뵌단 말이오.

 

 

작가를 처음 본지 10년 가까이 지나 두 해 전인가. 엄동설한에 서울 야간 성곽걷기에서 다시 만났었다.

그 때 뵌 작가는 이제 많이 세상을 관조하고, 인생에 달관된 듯 보였다. 콘트라바쓰의 심성을 터득한 탓일까. 별로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놓친 고기나 내가 잡았다가 슬그머니 놓아 준 고기에 대한 미련은 추호도 없는 것일까.

하나 뿐인 삶, 하나 뿐인 여자이기 보다는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리고 흐르는 강물에 종이배를 띄우고 안녕! 하고 손 흔들어 주고, 더 늦기 전에 보통 여자로 새로운 마음과 환경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일까.

이다음 작가를 다시 만날 기회가 온다면 내가 술을 권하고 싶어진다.

조지훈의 “사모”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처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그리고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느님을 위하여!

탄생과 죽음은 우리의 의사가 추호도 개입되지 않은 神의 엄숙한 놀이이기에 미약한 우리 인생에 미리 알고 정하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