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당하는 남자
사기 당하는 남자
나는 내가 생각해도 너무 순진한 것 같다.
남들은 나를 맹하다느니 멍청한 바보라고 말하겠지만...
아내는 나한테 귀가 얇다고 하던가.
나는 내가 남을 생각해 주고 믿는 만큼 남도 나를 반드시 생각해 주어야
한다는 착각 속에 산다. 그러기에 믿었던 사람에게 쉽게 상처받고 아파한다.
그러기에 늘 주위 사람들에게 사기만 당하고 산다.
시내를 걸어가는데 구형 그랜저가 스르르 내 곁에 멈추고 창문을 내리더니
손짓을 한다. 나는 길을 묻는지 알고 다가갔더니 투명비닐에 얇게 접어
포장한 T셔츠 한 묶음을 가리키며 유명 상표 셔츠인데 대리점에 납품하고
기름
값이라도 하려고 몰래 빼냈는데 15개에 20만원 가는데 돈 있으면 2만원만
달라고 했다. 나는 너무 싼 것 같아 얼른 2만원을 주고 한 묶음을 받았다.
그리고 기분 좋게 집에 들어가 아내에게 자랑을 하고 풀어보니 첫 장만
유명 메이커고 다른 것은 상표도 없는데 전부 겉만 멀쩡하고 속은 다 해진
입지도 못하는 옷들이었다.
아내한테 핀잔만 듣고 개망신 당해서 점잖은 입에서 욕이 나올라 했다.
수 년 전 엽총을 싼값에 구입하려고 아는 사람을 통해서 한 사람을
소개 받았다. 그런데 선불로 10만원을 주었는데 며칠 후 찾아와 경찰서에
총포소지허가증을 신청하러 가는 길인데 돈이 부족하다며 또 10만원을 요구했다.
어차피 그에게 지불할 돈이니 아무 생각 없이 돈을 건네주었다.
그러나 그 후로 영영 소식이 없었다. 그 사람 점포로 전화해 보니 그만
두었다고 하고 그 사람 거처를 알아내어 전화하니 방 값도 안내고 도망갔는데
그 사람 찾는 전화가 많이 온다고 했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 사람을 소개한 선배는 미안하다며 한 번 만나자고 했다.
그 후 그 선배를 만나서 서교동 미시크럽 룸싸롱에 가서 늘씬한 여자들과
즐겁게 술을 잔뜩 얻어 마셨더니 사기는 당했어도 그 다지 기분 나쁘거나
사기 당한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3층 내 방에서 내다보면 정면으로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가 시작되는
멀지 않은 강가에 하얀 건물의 라이브카페가 있다. 미모의 여자가 혼자 경영하는데
노래방 기기도 있기 때문에 밤늦게 우리 직원들이 많이 이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여자가 웬일인지 나에게는 친절하게 잘 해 준다. 내가 순수하다고 하던가.
친구로 지내자고 하던가.
나한테는 술값도 싸게 받고 가끔 저녁도 먹으러 오라고 초대도 하고
늦도록 책을 보려면 전화를 해서 심심한데 술 한 잔하러 오라고 하지를 않나.
미안해서 불도 제대로 못 켰었다. 서울서 내 손님들이 오면 내가 없어도
내 이름만 대면 친절하게 맞아주고 나한테 하듯 저렴한 가격으로 기분 좋게
대해주니 모두들 그 집을 좋아하고 자주 이용하기도 했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지 알고 좋은 책도 선물하기도 하고 가끔 그녀 차를
타고 멀리 가평까지 나가서 술도 마시고 오고는 했다. 물론 술값도 그녀가
지불했고. 그런데 어느 날, 단체 손님을 받아야 하는데 시장 준비를 해야 한다며
급히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카드를 춘천 집에 두고 왔다던가. 뭐라던가.
회사에서 돈 나온 줄 뻔히 알고 하는 소리에 나는 거절도 못하고 거금(?)을
빌려주었다. 그리고 주겠거니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며칠 지냈는데 밤이 되어도
그 카페에 불이 꺼져있는 날이 계속되더니 카페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사라져 버렸지 뭔가.
호박씨 까서 한 입에 털어 넣듯 그 동안 싸게 마시고 대접받은 술값을
한번에 제일 비싸게 몽땅 지불했나보다. 나를 타켓으로 삼을 정도로 내가
그녀에게 어리숙하게 보였나 보다. 창피해서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츠암내...
올 봄엔 대화방에서 알게 된 여자가 이곳으로 친구들과 몇 번 놀러 왔었는데
통화만 하고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어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만나게 되었는데 올 때마다 학교 친구, 자모회 친구, 헬스크럽 친구 등 사람이 바뀌는 등
여러 여자들을 데리고 왔었고 내가 매운탕에 토종닭에 대접해 주고는 했었다.
그런데 뭔 이야기 끝에 뭔 물품(밝히기는 그렇고)을 준다기에 고맙게 받았는데
물품 값을 달라기에 나는 농담인줄 알았더니 돈을 달라고 문자메세지가 오고 쪽지가
오기 시작하더니 공과 사를 분명히 하라던가, 아니면 회사로 찾아가서 받겠다던가,
아니면 물건을 도로 달라던가, 하면서 계좌번호를 적어 보내는 것이 아닌가.
물건은 포장을 뜯어 설치를 하고 사용하고 있는데 나는 기분도 상하고 겁도 나서
얼른 20만원을 그녀 계좌로 입금했다.
회사 사택 비품과 설비는 회사에서 전부 구입하고 수리하여 지불하기에 담당직원한테
문의했더니 타 견적 물품 값 보다 너무 비싸고 세금계산서가 있어야 하는데
그 것도 업자 등록이 되어서 승인된 개설 통장으로 입금되고
개인 통장 지불은 감사에 걸린단다.
그런데도 잘 받았다는 연락도 없어 전화를 해보니 통화정지가 되어있었고
사기 당한 것 같아 기분이 찜찜했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전화가 와서 핸폰을 분실했다면서
서울에 오면 술을 사준다고 하던가, 그 후로 영영 볼 수가 없는데 아마도 다른 아이디로
들어오지 않나 싶다.
세상에 나는 왜 이럴까. 내가 저주스러워 졌었다.
버스를 탔더니 웬 사내가 번호표를 나누어주어 얼떨결에 받았는데 상품권이 당첨되었다면서
번쩍이는 시계를 주고는 세금은 본인이 부담해야한다며
10%의 세금을 달라고 하지를 않나, 하두 귀찮게 찾아와 울며 겨자먹기로
피라미드 판매에 한 구좌 들어 주었더니 뭐, 좌우로 벌려 삼각형을 만들면
가만히 있어도 통장에 매달 일정수입이 들어온다고 하여 두 구좌 더해
150만원을 주었건만 수입은 커녕 매달 카드에서 이자까지 빼내가 아내한테
매달 핀잔만 듣고 사는 등, 이렇듯 크고 작은 사기를 수없이 당하고 살아왔다.
나는 왜 이처럼 어리숙하게 당하기만 하며 사는가 싶으니 속이 상하기도
해서 울화가 치밀기도 했다.
남의 말만 믿고 주식을 샀다가 10%로 하락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얼마 전 또 어느 여자가 자기 남편도 주식으로 쫄당 망했는데 큰손들과 작전에 들어갔다며
그 주를 사면 최소한 20배는 먹을 수 있다며 극비사항이라 맨 입으로는 안 된다고 해서
비싼 모듬회까지 사서 알아낸 정보로 그 동안 잃었던 것 이 번에 복구하면 다시는 주식 안 하기로
다짐하고 톡톡 털어 산 주식이 또 관리대상으로 빠져서 휴지조각이 되었지 뭔가.
쓰파, 정말 욕이 나왔다. 그 여자도 미안했던지 연락도 없다.
얼마 전에는 운전을 하고 오는데 냉동탑차가 깜빡이를 켜고 접근을 하더니
나한테 차를 세우라고 손짓을 한다. 나는 내 차에 이상이 있나 싶어 얼른 길가에 세웠더니
그 사람이 다가와 잠깐 보자며 냉동탑차 뒷문을 열고 아이스박스를 열어 보이며 백화점에 납품하고
오는 길인데 한 상자를 빼냈다며 20만원 어치인데 7만원만 내란다.
큼지막한 광어, 가오리를 보면서 술 생각이 나서 살까 하다가 어차피 아내 손을 거쳐야 하는데
또 야단 맞을 일을 생각해 포기하려다가 왜 하필 7만원일까, 궁금해서 번뜩 잔머리를 굴려 3만원밖에
없으니 줄테면 주고 말려면 말라고 내가 선수를 쳤더니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기분 나쁜 얼굴로
말없이 차에 올라 쏜살같이 사라진다.
나는 백미러로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내 얼굴 어디에 어리숙하고 맹한 구석이 있는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상한 일이다. 착하고 선하게만 생겼구만.
남들은 나를 물로 보는지 나한테만 그런 사람들이 접근을 하다니....
집에 가서 아내에게 그 말을 했더니 아내는 웃으면서
'처음으로 잘 했네요.' 하면서
'나만 사람을 잘못 보고 결혼을 했나 봐'. 혼자 말처럼 쫑알거려서 괜히 안할 말을 했구나 싶은 것이
후회되면서 나는 정말 띨한 것이 아닌가 씁쓰레한 기분이 든다.
- 새 해에는 부디 착하고 나에게 도움 되는 좋은 사람만 만났으면... -
2002. 12. 30. - 운 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