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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졸업식

운명2 2015. 9. 18. 05:11

                             딸의 졸업식
 
 내가 졸업할 때는 한 번도 부모님이 안 오셨던 것 같다.
 시골에 계셨던 탓도 있지만 연로하신 부모님이 마음으로만 챙겼지 손수 찾아다니거나 

선물 같은 것은 더 더욱 없었다.
 늘 막내인 나는 나이 차이가 좀 나는 누님(지금 응암동에 살고 계신다) 손에 이끌려 입학하고

그 나마 졸업식 때는 누님도 안 오셨다. 아마도 누님이 결혼을 한 탓인지도 모르지만.

누님이 오신다고 했어도 내가 반대를 했을 것이다.
 늘 입학은 화려하게 했지만 졸업은 초라하기만 했다.

한 번도 수석은 커녕 우등상도 간신히 탈 정도로...
 아마도 변명 같지만 참 선생님 같은 존경할 만한 스승을 못 만난 탓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 졸업식은 꼭 챙기고 반드시 참석해 왔다.
 
 졸업 씨즌은 꽃값이 오를 정도로 요즘은 부모가 졸업하는 자식에게 꽃을 선물한다.

온갖 고생을 하고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졸업하는 자식이 대견스럽기도 하겠지만

으레 꽃을 선물하는 것이 당연지사가 되었다. 자식이 뒷바라지 해준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감사의 꽃다발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딸이 이번에 하는 말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아무 뜻 모르고 졸업을 했는데 이번에는 기분이 착잡한 것이 좀 그러네...' 했다.
 저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학교에서 규율을 지키며 통제된 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학창시절을

맞이하겠지만 한 편 걱정도 앞서고 아쉽기도 했었나 보다.
 1학기 수시에 합격하고 2학기는 나가지도 않았는데 막상 졸업을 한다니 만감이 교체하리라.
 
 전 날 노원역에 나갔다가 여학생들이 찢어진 치마를 입고 속옷이 다 보이게 걸어 다녔다.

우리 때는 밀가루를 조금만 옷에 다 뿌렸지 얼굴에는 자제했건만 머리에 얼굴에 허옇게 뒤범벅이 되고

더구나 뻘건 케찹을 뿌리고 계란을 던져서 지저분하고 끈적거리게 하고 자기들끼리 쫓아가고 도망가고

 난리를 피우는 꼴을 보니 혐오감이 들었다.
 졸업도 좋다만 너무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여서 지나는 시민들 모두가 혀를 차며 쳐다보는데도

아랑곳없이 히히대던 꼴이 정말 역겨웠다.
 
 집에 가서 딸에게
 '내일 네 졸업식에는 밀가루나 케찹. 계란을 절대 묻히지 말아라. 정말 보기 싫더라.' 하고 주의를 주었다.

그랬더니 딸은
 '나한테는 뿌릴 친구도 후배도 없어요.' 했다.
 써클 친구나 후배들이 그런 일을 한다고 하던가.
 
 졸업식은 강당에서 했는데 좁은 강당에 연예계로 진출한 학생회장 조정린(섹션 T.V에 나온다던가)이

졸업한다고 방송국에서 촬영하느라 정말 야단 법석 이었다.

한 사람의 스타 때문에 모든 졸업하는 학생들이 무시당하고 희생되어 앉지도 못하고 서서

제대로 졸업식이 진행되지를 못해서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하지만 아내는
 '그래도 이 학교를 빛내고 홍보를 해주니 감수해야지요. 뭐.' 했다.
 
 교실에 돌아온 학생들도 담임이 조용히 하라고 야단을 치고 졸업장과 상장을 주느라 호명을 하는데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떠들고 통제 불능으로 난리를 피우고 벌써 밀가루와 계란을 묻혀 옷을

지저분하게 하고 이리 저리 다니는 학생에 여기 저기 사진 촬영에 정신없고 여기 저기 모여서

웃고 떠들고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더 말을 안 듣는 것 같았다.
 아수라장 교실을 보며 요즘 선생님은 참 힘들겠다는 생각도 든다.
 
 딸이 인상이 차갑게 생겼지만 아빠를 닮아서(?) 공부 잘하는 아이나 못하는 아이나 두루 친구들을

사귀고 하여 인기가 좋았던지 2학년에 이어 3학년 1학기도 반장에 선출되었지만

녀석이 공부에 전념하겠다고 사퇴를 하는 바람에 혹 담임한테 괘씸죄에 걸려 고전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담임과 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기에 그리고 1학기 수시 합격으로 아내와 같이

인사를 한 적이 있기에 구면으로 자연스럽게 담임께 인사도 하고 언제가 될 런지는 모르지만 술자리를 

약속도 하고 선생님과 사진 촬영도 하고 운동장에 나오니 작은 밀가루 봉지를 들고 다니며 뿌리고

계란을 던지고 요란했다.
 운동장이 뿌연 밀가루 먼지로 뒤덮고 가만히 있는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주는데 밀가루 묻힌 학생이

딸과 사진을 찍는 것을 보고 조금 기분이 언짢았지만 그래도 딸이 대인관계가 좋은 가 보다고

여유롭게 넘겼다.
 옛날에 여학교 졸업식에는 눈물바다를 이룬다던데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히히덕 거리고 좋아서 난리였다.

 우리들 초등학교 졸업식 때, 졸업식 노래를 재학생들이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이렇게 1절을 부르고 졸업생들이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하고

2절을 부를 때 여자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고 종당에는 울음바다로 3절은 재학생들 노래 소리만 들리던 그 때.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 졌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르는데 말이다.
 
 운동장에는 차로 가득해서 교문을 빠져 나오는데 차가 뒤엉켜 한참을 헤매고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교문을 나서면서 아내가 하는 말이
 '그래도 대학에 간 학생들 부모는 교실까지 찾아가지만 대학에 못간 어머니들은 교실에도 못 들어가고

운동장에서 서성이네요.'
 '그래?'
 '우리는 그래도 다행이지 뭐예요. 그 부모들 마음은 오죽 하겠어요.'
 정말이지 그 부모들 마음이 정말 착잡하고 망막하리라 생각을 해 본다.
 점심을 사주려고 하니 오늘 졸업식 하는 학교가 많은 탓에 고급 청요리 집은 물론 모든 음식점이

주차장부터 만원이라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몇 군데 헤매는데 딸이 다음에 먹기로 하고 그냥 집으로

얼른 가자고 하는 바람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는 딸이 기특하고 대견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내일이 발렌타인데이라고 남자 친구에게 줄 초콜렛을 사러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심히 걱정스러워 진다.
 내가 남자 친구 사귀는 것을 그렇게 반대했건만 이런 것도 애비를 닮았는지 사랑에 약해서

한 번 빠지면 헤어나지를 못하나 보다.
 아내도 걱정스러운지
 '글쎄, A군이 결혼을 하잔다네요. 츠암내... 어린 것들이 벌써 뭔 결혼이래.'
 아내는 그 놈을 A군이라고 호칭했다.
 '하영아! 내가 잘 아는 475라는 사이트에 보면 멋모르고 만나서 아님 미워하다가 얼떨결에 넘어가

이른 나이에 연애도 제대로 못하고 결혼한 여자들이 대부분 이더라. 남자는 대학 생활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고 좋은 남자들도 더 많을 테니 신중히 생각하기 바란다.'
 '......'
 '늘 내가 이야기했듯이 연애는 감성이라서 멋있고 행복하겠지만 결혼은 이성적으로

냉정히 판단해야 하는 거야. 결혼은 그래서 결코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고 마냥 행복한 것만도 아니란다.'
 '그래서 경험을 쌓고 있자나요. 아빠!'
 '조 기집애가 못하는 말이 없어!' 아내는 큰소리 쳤고
 '하영아! 사랑에 반대는 무언 줄 아니?'
 '무관심이요.'
 '알긴 아네. 사랑에 반대는 미움이나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야.

그러기에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하게도 되고 미워 하다가 사랑하게도 된단다.'
 '아쭈!' 아내는 힐끗 딸을 쳐다보며 놀라서 입을 벌리는 척 하고 나는 
 '이제 너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어 이성적으로 판단할 만큼 컸고

네 자신은 네가 지키고 네가 책임져야 하겠지만 아직 너는 나이가 어리고 나중에 후회하게 되면

다 소용없는 일이란다. 그런데 하영아! 진짜 남자는 여자를 아끼는 법이란다.

진정 사랑하는 남자라면 끝까지 지켜주고 싶은 것이 남자의 속성이니 너도 A군의 마음을

잘 파악해 보려무나.'
 아내는 소리 없이 웃으며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마쟈. 네 아빠도 진짜 남자였단다.'
 '흠! 흠!......'
 나는 헛기침이 나왔고 딸은 입을 삐쭉하고 어깨를 살짝 올리며 야릇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백밀러에 보였다.
 (짜슥, 그 비싼 초콜렛을 나한테나 사 가지고 오던지...)
 
                                                                  2003. 02. 18.     - 운  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