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번 유감
18번 유 감
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그 사람이 가장 잘하는 일(장기)이 18번이라 했다.
그러나 우리는 통상 그 사람이 즐겨 부르는 노래를 18번이라 한다. 왜 18번이라고 하는지
그 어원과 유래는 잘 모르지만 일본의 가부끼에 18번이 제일 잘하는 것이라던가.
아마도 일본에서 들어온 말이 아닐까 싶다. 하여간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 자기의 18번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뜨거운 안녕>을 즐겨 부르던 군대 시절의 상관, 늘<모닥불>을 잘 부르던 K양, <허무한 마음>의 H형,
<미워하지 않으리>의 B형, 나훈아 노래만을 부르던 동료 J, 외국곡<제비>를 부루던 C부장,
<목포의 눈물>이 18번이던 직장 상사, 또 주석에서는 언제나 <성냥공장 아가씨>를 불러 제끼던 S씨,
<환상의 여인>의 E, 노래 제목만 들어도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18번도 잘 선택해야만 할 것 같다.
가수도 슬픈 노래를 부르면 스스로 슬픈 운명에 빠진다는 통계도 나와 있어 슬픈 노래를 부른 가수가
요절했거나 슬픈 운명의 길을 걷고 있는 수가 많다고 한다.
<애수의 소야곡>의 남인수는 <눈감아 드리오리>란 노래를 끝으로 41세에 죽었고
29세에 요절을 한 차중락은<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부르고 가버렸으며
신장염으로 죽은 배호는<마지막 잎새>를 부르고 71년 가을, 낙엽처럼 갔으며
늘 슬픈 곡조로 노래하던 김정호도 젊은 나이로 갔고 탤런트 가수 박길라 역시 <나무와 새>라는
노래에서 '작은 날개 가만히 접어서...' 노랫말처럼 22세 꽃다운 나이로 인생의 날개를 접었다 한다.
아마도 그는 죽어서 새가 되었으리라.
가수는 아니지만 <가자 가자 쫒기우는 사람처럼 백골 몰래 또 다른 고향으로 가자> 고 읊었던
시인 윤동주도 예견이라도 했었던지 지금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북간도에 초라하게 묻혀서
백골 몰래 늘 조국으로 향하리라.
가수가 아니라도 늘 슬픈 노래만 즐겨 부르는 사람은 그 운명도 밝지 못하고
스스로 조울증에 빠진다고 한다.
고문치사로 죽은 박종철군의 18번은 <꽃상여 타고>였으며
최루가스로 얼룩진 듯한 저 하늘 위에라도 오르고 싶다던 이한열군의 18번은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던 <아침이슬>이었단다.
좀 안 된 이야기지만 '차라리 재가 되어 숨진다 해도, 너를 안고 가련다. 아! 불나비 사랑' 이런 노래의
<불나비>를 잘 부르던 내가 아는 어느 형은 74년 서울 청량리 나이트 클럽 화재사고로 애인과 함께
참변을 당했으니 말이다.
내가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인가 보다. 그 당시에 <유정천리>란 노래가 유행했었던지
아무 의미도 모르고 나는 '못 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 하고 어른들 흉내를 냈었는데
내 노래를 들은 아버지께서 그야말로 불호령을 내리셨다. 지금 나의 애들이 그 노래를 부른다면
나도 죽지 않을 만큼 때렸을 것이다. 조그만 놈이 못살아도 좋다니...맞아도 싸지.
그런데 지금 나의 딸 애는 <젊음의 빈 노트>인지 <젊음의 흰 노트>인지 그 노래를 곧 잘 흉내낸다.
학창시절 나의 18번은 이웃 마을 여학생을 내가 짝사랑했던 것도 작용했음인지
그 당시 유행하던 빠른 템포의 <짝사랑>이였다.
내가 짝사랑하는 것을 안 그 마을에 사는 나의 급우는 고맙게도 여름밤 냇가에 동네 젊은 남녀들로
어울려 노는 자리를 마련했었는데 더욱 친절하게도 그 여학생을 내 옆에까지 앉혀주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나는 언변이 없어 말도 잘 못하는 주제에 그토록 사모하는 여자와 나란히 앉았으니
가슴은 쿵쿵 뛰고 몸은 재봉틀처럼 떨었는데 친구의 사회로 손을 잡고 서로 손뼉도 치며
게임을 할 때는 정말 아찔해서 구름에 뜬 기분이였다. 벌칙으로 우리 둘이서 노래를 부를 때
짖궂게도 친구는 <짝사랑>으로 지정곡까지 준 것까지도 좋았는데
내가 '왜 그런지 가슴이 두근거려요....'하고 나갈 때 그여자는 미쳤던지
청승맞게도 '아~ 으악새 슬피우니 ....' 하고 나가는것이 아닌가. 장내는 웃음 바다가 되고
나는 괜히 내 잘못만 같아 그 여자 한테 미안하고 부끄러워 홍당무가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김희갑씨가 가끔 부르는 그<짝사랑>이 역사가 훨씬 깊었다는 데
그 여자와는 역시 짝사랑으로 끝났었고 그 날 처량하게 부르던 그 여자는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사업가에게 시집갔다는 소문과는 달리 그리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고 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구슬픈 '짝사랑' 노래가락처럼 다방을 하다가 무슨 보험도 하고 건강보조식품 판매도 하더니
요즘은 다단계를 한다는데... 모르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나에게 전화번호는 끝내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내가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는 신혼부부끼리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분위기에 맞지 않게 이별이나 그리움을 주제로 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상당히 많아
나는 실망했었다.
아마도 그들의 18번인가 본데 오늘같이 좋은날 행복한 사랑의 노래를 불러야지
제목은 그럴싸 하지만 '가지 말라고 애원했지만 못 본 체 떠나 버린 너...' 이런 귀절의 노래를
아무 느낌도 없이 신혼여행을 와서 막 불러대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는 <보슬비 오는 거리>라든가
<동숙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으니 차라리<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나 <사랑만은 않겠어요>,
<불씨>를 안 부른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때 내가 부른 노래는 '사랑이 별거드냐. 좋아하면 사랑이지...' 이렇게 시작하는
김세레나의 <짚세기 신고 왔네>였었다.
그 후로 나는 뚜렷한 18번이 없었는데 몇 년 전부터 나도 모르게 강은철의 <삼포가는 길> 이
18번이 되어버려 아무 때, 아무 장소나 흥이 나면 그 노래를 불렀었다.
그런데 그 것도 내 운명이었던지 지난 해 나는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복장포(경기도 가평 북한강가의
작은 포구)로 오고 말았다. 그것도 전산과에 근무하는 후배 B씨가 ' 거 봐요..늘 삼포로 간다더니
복장포로 가잖아요.....'하고 농담을 하기에 깨달았지만 정말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올 때는
한발 두발 한숨만 나왔었다.
우수개 소리겠지만 결혼식 피로연에서 신랑이<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이라서........> 하고
부르자 신부는 이에 질세라 <과거를 묻지 마세요> 란 노래로 답했다고 한다.
그러니 아무 생각 없이 부르는 18번은 조심해야 할 것 같다.
다재다능하게 분위기와 장소에 따라 가곡도 부르고 니나노 술집에서는 뽕짝도 부르며
조용한 포크송이나 팝송도 부를 줄 알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18번은 있게 마련이라 밝고 행복한 노래를 택해야 좋을 것 같다.
유행가가 한낱 이별이나 실연, 고독 등을 주제로 한 노래뿐이라서 문제도 있지만
얼마 전 작고하신 유진오박사는 <학도가>와 <희망가>를 즐겨 불렀는데 죽기 전까지도
가사를 외웠다고 하고 모 정치인은<베사메 무쵸>를 잘 부른다고 하는데
내 18번은 이제부터라도 송창식의 <우리는>과 윤항기의 <나는 행복합니다>로 해야 할 것만 같다.
87년. 8월.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