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의 회상
지난 여름의 회상
계절의 변화란 참으로 묘하다.
연일 30도가 넘는 무더위에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지쳐서 맥이 풀리고 샤워를 하고나서도
금방 또 땀이 흘렀었다. 바람도 한 점 없었을 뿐 아니라 그나마도 뜨거운 바람이고
불쾌지수는 높아서 짜증이 나던 때가 엊그제인데 이제는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고 새벽에는
찬 기운이 이불을 더듬게도 하였다.
그런데 더위가 최고로 기승을 부릴 때는 모기도 혹서에 늘어졌는지 보이지 않더니
처서가 지났는데 뒤늦게 모기가 나타난다. 처서에는 모기도 입이 삐뚤어진다더니
지금의 모기는 처서에도 개의치 않나보다.
삼복더위에 늘 옆에 두고 껴안았던 고마운 나의 애첩 죽희도 이제는 슬그머니 밀어내게 되어
무관심을 보이고 멀리하게 되니 인간의 간사함에 괜스레 죽희한테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더위도 물러갔으니 죽희의 고된 역할도 끝나서 이제는 편히 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죽희와도 이별을 선언해야 했다.
나는 계절적으로 여름을 가장 싫어한다.
더위에 약한 탓에 땀이 많아서 청결하지 못한 이유가 그중 하나이다.
그러나 여름은 나와는 반대로 나름대로 더위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대로 견딜 만한가 보다.
요즘은 젊은 여자들 의상도 대담해져서 지난 여름 지하철을 타면 여기가 지하철 안인지,
한강 시민공원 수영장인지 착각할 정도로 배꼽이나 엉덩이가 보이는 것은 다반사요.
브레이져를 했는지 안했는지 분간이 안 되도록 등이 전부 노출되고 끈도 체인에 투명 끈에
갖가지 모양과 색을 동원하고 있었다.
스커트는 입은 것인지 만 것인지, 손수건만한 것을 엉덩이만 걸치고 해수욕장에서나 신는
샌들이나 슬리퍼를 아무렇지도 않게 끌고 다니는 모양이 예전에는 못 보던 다양한 스타일이다.
나는 그녀들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민망해서 눈길을 피하다가도 호기심에 뽀얀 가슴언저리를
슬쩍슬쩍 훔쳐보기도 했다. 그런 나를 보고 아내는 웃으면서 나를 가만히 꼬집기도 했지만....
그러한 남자들의 속성을 꼬집기 라도 하듯이 아내는 나에게 슬며시 떠보며 묻는다.
“참 이상하죠? 여자들은 의상을 자꾸 벗으려 하는데 왜 남자들은 자꾸 입으려 들까요?”
그러고 보니 남자들은 그 더위에, 냉방되는 지하철 안에서 땀을 흘리면서도 넥타이를
매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나이 들어가면서 호르몬의 불균형에 의한 것인지....시대의 흐름 탓인지.....
여성은 자꾸 남성화 되어 가서 대담해져 가고, 남자들은 내성적으로 변해 점점 나약하게
여성화되어 가는 것을 때때로 느낀다.
부부간에도 간통죄가 성립되고 성폭력죄가 되도록 법을 만든다 하질 않나,
세계적으로는 수 십 년 안에 일부일처제가 소멸될 것으로 전망한다고 하니
후세에는 一夫多妻가 아닌 一妻多夫制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혼자서 이런 저런 생각에 빠지다가
“여보, 맞고 사는 아내보다 맞고 사는 남편들이 더 많다는 사실 알아?”
“뜬금없이 뭔 말 이래요?”
“아니 당신 알고 있는가, 그냥 해 본 소리야. 여자들은 자꾸 거칠게 남성화되고
남자는 점점 여성화되어 가는 것 같아서... ”
“그래요. 당신도 지금은 그런대로 버티지만 나중에 매 맞지 않으려면 건강 잘 챙겨서
끝까지 힘을 길러 놓구려.”
“엥?”
'해방 이후 모기와 여자들만 더 독해 졌다 더만......'
공연한 이야기의 화살이 내게 꽂히는 바람에 멀거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여하튼 그 지긋지긋한 더위의 여름은 가고 내가 좋아하는 코스모스의 계절이 왔다.
가을이면 제일 먼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달라던
‘가을편지’가 생각난다.
편지를 쓰겠다가 아니라 편지를 하겠다는 것은 편지는 이미 써 놓았는데 보내기만 하면 된다는
말 같기도 하다.
그리고 가을하면 윤동주 시인이 생각난다.
여기저기 단풍 같은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는 표현이 너무 좋고, 가만히 파란하늘을 쳐다보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들고 손바닥으로 눈썹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강물이 흐르고....
이런 표현은 가을을 내 가슴속으로 끌어다 놓기도 한다.
시간은 내 좋아하는 코스모스도 한들한들 수줍게 피워낼 것이고
이 가을도 가녀린 코스모스를 닮은 나붓나붓한 추억 한 자락을 회상하며
비발디의 가을 저편 언덕에 남겨지는 나긋한 여유로움이 바람처럼 불어오리라.
2005. 08. 27. -운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