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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그라스 이야기

운명2 2015. 10. 15. 18:55

             썬그라스 이야기


작년 12월5일 눈보라 속에서 동호회에서 관악산 등산을 했었다.
 우리 일행은 엄대장을 따라서 바짝 따라붙었지만
젊은 백구는 언제나 뒤에 처져서, 선두가 한 참을 기다려야

헥헥거리며 따라왔다.
 암벽을 타고 넘어서 백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기진맥진 올라오면서도 그는 까만 썬그라스를 들고는

우리 일행 중 누가 썬그라스를 떨어뜨린 것 같다면서  

주인을 찾는데...
 얼핏 봐도 명품 썬그라스로 보여서 나는 내꺼다 우기면서
반 강제적으로 얼른 빼앗으려 들었더니, 평소 거짓말 못하는

내 습성에 금방 들통이 났고.
 우리 회원들 것이 아닌 것을 알고 백구는 썬그라스도 없는데
잘됐다면서 자기가 써야 되겠다고 했다.
 그 때부터 나는 백구 옆에 붙어서 백구를 꼬시기 시작했다.
 그 썬그라스는 너한테는 안 어울리고 내가 쓰면 딱이다는 등.
 결국 술 좋아하는 백구한테 술을 사주기로 합의를 보고

그 썬그라스를 넘겨받았다. 

그래서 나한테 썬그라스가 또 한 개 더 생겼다.

 참으로 세상 살다보면 이상한 일도 많다.
우리 일행 열댓명이 산을 올라가면서 아무도 못 본 것을

맨 나중에 올라오던 백구는 어찌 보고 주웠을까.
 (개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그러고 보면 뭐든지 눈에 잘 띄어 잘 줍는 사람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은 나도 2년 전에 소백산 등산을 하는데 오르막길에서

내가  막, 발을 떼려는 순간. 계단 밑에 덩그라니 썬 그라스가 보였다.

나는 우리 일행이 분실한 것으로 보고 주인 찾아 주겠다고 주웠는데,

스포츠 안경으로 렌즈가 유리가 아닌 프라스틱이었는데 국적은 없지만

꼬부랑 글씨로 보아 싸구려 같지는 않고 외국의 유명 메이커 같기도 했다.

그런데 내 앞에 많은 사람들이 올라갔는데 그들은 왜 안경을 보지 못했을까.

올라가느라 힘들어 발밑에 땅을 볼 여유 조차 없었을까.

아니면 나 같은 속물이 아니기에, 내 것이 아닌 것은 보고도 못 본 척

올라간 것일까. 

 

그런데 정상에 올라가서 주인을 찾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서

결국 그 썬그라스가 내 것이 되어 그 날 쓰고 간 것이었다.

어쨌든 백구가 주운 그 썬그라스도 내 것이 되어 내가 잘 쓰고 다녔다. 
 안경테에 마데인 이태리(ㅎ)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명품 같아

보였고 다만 좌측 그라스가 땅에 떨어지면서 조금 흠집(기스)이

난 것이 흠이었지만 눈에 띄일 정도는 아니었기에

옥의 티라고 여기고 아주 만족스러웠다.
 백구는 나를 볼 때마다 안경 값으로 술 사달라고 졸랐지만,

차일피일 미루면서 지금까지 버텨왔다.

 그런데 엊그제 시산제가 끝나고 술집에서 잡담 중에 백구가 주워서
나를 주웠다는 그 썬그라스 이야기가 나왔고, 
 혜리가 안경을 보여 달라고 해서 보여주고, 여기저기서 써보고.
나한테 잘 어울린다는 사람에, 여자 것이라 안 어울린다는 사람에,
그 안경을 잃어버린 사람은 얼마나 속이 상했겠냐는 사람에.
 다시 한 번 백구한테 술을 사라는 사람에...
 그리고는 혜리한테 그 썬그라스를 받아서 배낭 위 창문 위에

올려놓았었는데... 
 자리를 옮겨 노래방에 가자마자 아뿔싸! 내 썬그라스를 안

챙겨온 것이 생각나서 엄대장이 그 술집에 곧바로 전화를 하고,
 안타까워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아니면 그 술집에서 빌미를
제공한 혜리의 책임감이었는지,
 혜리가 자청해서 그 술집으로 찾으러 갔기에.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를 걸었지만 그 술집에 썬그라스는 없다고
한다. 아마도 불과 10여분 그 사이에 누군가 집어 삼킨 것 같다.
 떡집에 다시 가져다 줄 시루떡 찜틀 챙기느라 정신을 쏟다보니

정작 내 썬그라스는 못 챙기는 불상사를.ㅠㅠㅠㅠ


 백구한테 술을 샀더라면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서너 달 내 수중에 있었던 그 안경은 결국 내 것이 아니었나보다.
 나하고 인연이 없으면 아무리 챙겨도 잃어버리게 마련 아닐까.

 수년 전에 중국 상해에서 써커스 구경을 하려고 줄을 서 있는데,
 조선족이 비싸 보이는 썬그라스를 들고 호객행위를 하며

만원에 팔고 있었다.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고, 입장 시간이 가까와 오자 5천원으로
내려가고 나는 농담삼아 2천원을 불렀더니, 선뜻 2천원에 내게
썬그라스를 전달해주었는데. 나한테 팔자마자 이번에는 천원으로
내려갔다.
 그래서 같은 일행이 사무실 동료들에게 선물한다면서 열 개를
구입했는데, 나는 괜히 손해 본것 같은 기분에 사고도 찜찜했었다.
 그런데 그 갈색 썬그라스는 산에 가기위해 배낭에 꽂아서 마침
시내버스가 오기에 막 뛰어서 버스에 탔는데, 타고 보니 

썬그라스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

그 썬그라스는 잃어버렸다.
 그런데 2천원 짜리라서 그 때의 아쉬움은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아쉬움이 커서 어제도 배낭을 몇 번이고 다시

뒤적거리기도 하고...
 오늘 그 썬그라스를 끼고 찍은 사진을 보니 아까운 마음에 하루

종일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역술가들은 말한다. 함부로 물건을 주워서 들고 집으로 오는

것이 아니란다. 그 물건에 혼(귀신)이 붙어와서 그 물건으로 인해서

액운이 생길 지도 모르니 아무거나 함부로 주워들고 오는 것이 아니라고...

그러고보니 나를 위해 신께서 미리 알고 액땜으로 내게서 떨어지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운명적으로 나는 복 받은지도 모르겠다. 


  한편 지금 조용히 생각해보니 법정스님의 설법도 떠오른다.
어떤 것에 소유하려고 집착을 하다보며 또 다른 집착이 생기고
결국은 불행해진다고 했던가. 그래서 무소유가 홀가분하고 좋다던...
 어떤 물건이나 사람의 만남이나 인연이 아니면 아무리 집착을 하고
붙잡으려 해도 떠나게 마련인가 보다.
 반면에 인연이 있으면 허투르게 관리를 하고, 버리려 해도 버리지
못하고 소유하고 있는 오래된 물건이 있고.
 끝난 듯싶다 가도 연결되는 운명 같은 인연의 끈에 우리는 때로
가슴을 애태우기도 하고,
 극적인 해후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애초에 그 썬그라스는 내 것이 아니었듯이, 액땜을 했다 치고

빨리 잊어버리고 새로운 운명의 인연을 만나고 싶어진다.    
 백구는  다시 또 주워준다고 했으니...

 썬 그라스를 잃어버리고 안타까워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태호형이  술 한잔 하자고 하더니 돼지갈비에 소주를 사주고는

고맙게도 썬 그라스를 하나 건네 준다.

이태리제는 아니지만 불란서제라면서 아쉬운대로 산에 갈 때

쓰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내가 산 썬 그라스도 있고, 딸이 생일 선물로 사준 것도

있고, 주운 것도 있고, 얻은 것도 있고,

썬 그라스가 대 여섯개나 된다.                                    

                                    

                                          2010. 03. 29. 

                                                               -  운 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