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운수 좋은 날
아침에 시험 공부한다는 아들을 정보도서관에 태워다 주고
느긋하게 돌아오는 길인데, 앞 차 뒤에서 무슨 연두 빛 삐라 같은 것이
낙엽처럼 파르르 날려서 앞 차를 따라 날리더니 이내 내 차 쪽으로 날려 오는데,
그 순간 ‘만 원 짜리다!’ 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침과 동시에 급브레이크를 밟고
내려섰다. 근데 돈이 안보여서 체면 불구하고 엎드려 차 밑을 들여다보니
그 밑에 있지 않은가. 다시 차를 앞으로 빼고 그때서야 비상등을 켜놓고 돈 만원을
주워들었다. 그 사이를 못 참아 뒤에서 빵빵거리는 놈에게 돈을 흔들어 보이며 타는데,
길가의 여자는 그런 나를 보고 생끗 웃어서 조금은 쪽 팔렸다.
그까짓 돈 만원에 도로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줍다니...
그래도 이 무슨 횡재란 말인가. 괜히 운이 좋은날 같아서 기분이 좋아지고
이 운을 이어가기 위해 로또를 사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나는 표정관리가 잘 안돼서 기분이 나쁘면 우거지상에 말이 없어지고,
기분이 좋으면 금방 얼굴에 표가 나서 거짓말을 못한다.
집에 들어서니 아내가 한 마디 한다.
“뭐 좋은 일 있었어요?”
“아니, 왜?”
“글쎄요, 기분 좋아 보이니 뭔가 좋은 일 있는 것 같아서...”
아니 내가 돈 주운 걸 이 여자가 어찌 알았데.
나는 사실대로 고백하고, 이 돈으로 로또 복권을 사겠다고 말했더니,
아내는 여태 한 번도 맞지 않는 복권을 쓸데없이 뭐 하러 사느냐며,
그 돈으로 이따가 점심시간에 아들한테 가서 점심이나 사주자고 하면서
자기가 주운 것처럼 잘됐다고 좋아한다.
점심시간.
보람아파트 앞에 2,500원짜리 해장국집으로 가자며 아내는 아들한테
나오라고 문자를 넣고, 만원이면 딸도 먹을 수 있다고 딸도 가자고 데리고 나선다.
우이씨. 돈은 내가 줍고 생색은 누가 낸단 말인가.
해장국집은 언제나 손님들로 붐빈다. 그런데 그 곳에서 20여 년 전에 같이 근무했었고,
지난 해 퇴직한 선배님을 만났다. 사람들이 많고 그 선배는 먹는 중이라서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자리를 잡아 우리 가족은 해장국을 먹었다.
그런데 종업원이 오더니 저쪽 손님이 여기까지 계산하고 갔다고 귀띔해 준다.
출입구를 보니 그 선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뭔가 오늘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은 것이, 아내도 공짜로 점심 먹었다고 좋아한다.
복권 살 돈은 여전히 유효해서 나는 기분이 업 되고...
의정부 사는 마형한테 전화가 왔다. 백 갈매기인지, 하얀 개인지 백구라는 동생하고
저녁에 술이나 하자고 하면서 연락을 하란다.
그런데 아무리 전화해도 그 동생은 안 받는다. 잘 됐지. 뭐. 오붓하게 둘이서 마시면 더 좋지.
그 때 초인종이 울리며 아내의 친한 성당 자매가 시골 잔치에 갔다 왔다면서
감과 잡채, 편육을 가져왔다. 오늘 먹을 복이 터졌다. 아내는 그걸 보더니 갑자기
조껍데기 막걸리 술 한 병 사가지고 안주삼아 불암산이나 가자고 한다.
저녁 6시에 나는 약속 있다고 하니, 얼른 갔다 와도 늦지 않을 거란다.
잡채와 편육에 눈이 어두워 나는 아내를 따라 불암산에 올라갔고,
헬기장 부근에서 자리를 펴고 한 잔을 막 마셨는데. 마형한테 전화가 왔다.
상계역으로 빨리 오라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하는데 아내는 주섬주섬 짐을 싸며,
마음은 벌써 상계역에 있는 것 같으니 어서 내려가라면서 자기는 천천히 내려가겠단다.
오호, 오늘은 아내도 예쁜 짓만 하는 구나.
아내에게 미안했지만 나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리나케 달려 내려갔다.
상계역에서 마형부부를 반갑게 만났고, 우리는 화기애애하고 소탈하게 웃으며
막걸리 5병을 마셨다. 배가 불러서 더 이상 못 마시고 일어섰는데,
계산은 이미 형수가 다 해버린 뒤였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운수대통으로 일이 잘 풀리고
먹을 복이 따르는 것 같아서, 요즘 가을을 타는지 우울하던 차에 모처럼 기분이 최고로
빨갛게 상종가를 쳐서 울증이 조증이 돼 버렸다.
마형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복권도 사고, 집 앞까지 오니 배도 꺼지고
술 한 잔 더하고 싶은 생각이 들고. 그 순간 차에 있는 엉겅퀴술 생각이 났다.
평소 마음에 들지 않는 직원이 눈치는 빨라서 인사고과를 앞두고 고향에서 어머니가
가져온 엉겅퀴술이라면서 엉겅퀴술이 자양 강장제라면서 남자들한테 끝내준다고
차에 페트병으로 하나 뒷좌석에 실어놨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서 엉겅퀴술맛은 어떤지
오늘 마셔보자고 주차장으로 갔다.
그런데, 뜨악! 뜨볼.
어떤 닝기리 같은 노무시키가 언제 그랬는지. 내 차 뒷바퀴 윗부분을 조금 망가트렸던 것이다.
아흐, 수리하자면 돈 만원 주운 것에 수십 배는 더 들게 생겼다.
엉겅퀴술을 들고 씩씩거리는 나에게, 아내는 쪽파를 다듬으며 남의 일처럼
“많이 망가져서 보기 싫을 정도가 아니면 그냥 타지요. 뭐. 차도 바꿀 때도 됐고...”
“앗싸! 동동 구리무!”
차주가 차를 바꾼다니 갑자기 기분이 180도 변해서 아까는 욕했지만,
누군지 모를 그 넘이 고맙게 여겨지기도 했다.
식탁에서 아까 먹던 편육과 잡채를 안주 삼아 마시는 자양 강장제라는
엉겅퀴 술맛이 혀끝에 착착 달라붙는 것이...
뭔지 모를 힘이 불끈 불끈 솟는 것 같기도 하고...
알딸딸해서 기분이 묘해지는 것이...
주방 바닥에 신문지를 펴고 앉아 파를 다듬는 아내가
오늘따라 엄청 착하고 예쁘게 보여 고개를 흔들어보고 다시 쳐다봐도,
아내는 역시 미인으로만 보였다.
2008. 11. 06. - 운 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