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때로는 위로 받고 싶다.
나도 때로는 위로 받고 싶다.
오늘 하찮은 이유로 아내와 다투었다.
아니 다투었다기보다 일방적으로 내가 밀리고 나는 화가 나서 큰소리 치고
삐져서 집을 나왔다.
여태 고분고분 하던 아내가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나이가 들면서 고개를 들고
나에게 명령조로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역전 현상이 일어나서 내 자존심에
상처가 생기면서부터 나는 아내보다도 이런 서글픈 현실에 더 화가 나서 울분을
참지 못하고 반항하는 어린애가 되었다.
추운 겨울날에 밖으로 나왔으나 딱히 갈 곳도 마땅치 않다.
전에는 내가 집을 나오면 아내가 어디냐고 전화를 해서 들어오라고 하면
마지못한 척 들어가곤 했지만... 뜨볼. 이제 전화도 안한다.
꿀꿀한 기분에 술이라도 진탕 마셔야 할 텐데, 친구넘들 불러서 술 마시기는
어쩐지 창피할 것 같다. 무슨 일이냐고 물을 테고 아내 때문이라고 솔직히 말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아닌 척 허허거리며 술 마실 기분도 아니고...
이런 날은 그래도 여자 친구라도 불러내서 아내 흉이라도 보면서 술이라도 마시면
스트레스가 확 풀릴 것도 같은데 여자 친구도 없을 뿐 더러 애인은 더더욱 없으니
더 죽을 맛이다.
인터넷에 입문한지 10년 가까이 되고 늘 대화방에서 웃고 떠들며 패밀리처럼
와라락! 뽀! 손가락으로는 수없이 안고 입맞춤도 했건만 막상 누구하나 불러낼 사람도 없는
현실이 또 나를 더 슬프게 한다.
속 모르고 남들은 풍요속의 빈곤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차라리 풍요속의 빈곤이라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혼자서도 술 마실 수 있는 곳.
그 유명한 미령이와 겉절이를 찾아가기는 넘 멀다.
가끔 [보고 싶어요. 전화주세요.] 이런 스팸 문자도 오늘은 안 온다.
혼자서 술집에 들어가기는 처음인 것 같아서 망설여졌지만
춥긴 하고 갈 데도 없고 할 수없이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중년의 여자가 반기면서 혼자냐고 묻는데, 혼자라고 하니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잘 오셨다 면서도 또 슬쩍 아래위로 훑어본다.
맥주와 안주를 시켰지만 여기저기 떠드는 소리와 담배연기에 잘못 왔구나 하고
금방 후회하게 된다. 맥주를 가져오면서 “마시고 계세요” 하는 말은 시간나면 와서
같이 마시겠다는 말로 들렸지만 종업원 없이 혼자 하는지 주인이 바빠서 올 생각도 안하는지...
아예 올 마음도 없었는지. 단골과 대화중 이었는지 다른 테이블에 앉아서 나는 아랑곳없이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맥주는 무척 차가왔지만 이렇게 맛없게 맥주 마시기도 처음이다.
뭐, 하나 같이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이 나도 복이 지지리도 없는 것인지...
집에 들어오니 아내는 성당에 가서 아직 안 왔단다. 왠지 또 술을 더 마셔야만 할 것 같은...
아니 마시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라면을 끓여서 양주를 컵에 따랐다.
라면을 안주로 양주를 마시기도 처음일 것이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양주가 평소와는 달리 통증 같은 것을 느낀다.
술이 취한 상태에서도 아내가 오기 전에 라면 먹은 흔적을 없애기 위해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에서도 왜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이 들었는지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자체와 그런 생각을 해야만 하는 내 자신이 싫고,
초라해서 나를 또 비통하게 만든다.
눈물을 흘리면서는 아니더라도 슬픔을 삼키며 냄비를 닦고, 컵을 씻어놓고 아내가 오기 전에
얼른 잠이 들고 싶다. 그래야만 그나마 체면이 서고 더 망가지지 않을 것 같은 심정이다.
오늘 같은 날은 누구든지 남자가 아닌 넉넉한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어린애처럼
하소연하고 아내 흉을 실컷 보고... 아내의 잘못을 주저리 주저리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일러바치고 싶다. 그러면 그 여자는 아기처럼 나를 감싸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위로 받고 싶어지는 밤이다.
오늘따라 그 여자가 한없이 보고 싶어진다.
2009. 01. 12. - 운 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