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어 안 좋은 날
바람 불어 안 좋은 날
벚꽃이 바람에 꽃비 내리듯 날린다.
봄이라서 그런가, 괜히 울적하고 알지 못 할 그리움에 어제도 늦도록
술 마시고 아침에 간신히 출근했다. 아침에 음주측정이라도 한다면 분명히
걸렸을 것이다. 종일 숙취로 고생하고 퇴근시간이 되었는데, 운전하기도
싫어지고 나 홀로 타고 다니면서 연료 낭비하느니 기름 값도 절약할 겸
시내버스 타고 퇴근하기로 했다.
그런데 나를 터미널까지 태워준 직원이 간단히 한 잔만 하자고 해서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자꾸 거절하기도 그렇고 해서... 몸에 좋다는 안주로
소주를 각 1병을 마시고 헤어져 서울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청량리에 도착해서 전철을 타려고 내려가는데, 전에 같이 근무했던
퇴직사원 둘을 만났다. 정면에서 걸어오는 그들을 보고 나는 모른 체
얼른 피하려고 했지만 그들이 나를 먼저 보고 부르며 반갑게 인사한다.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작정을 하면 이상하게도 술 마실 일이 생긴다.
더 술을 마시기 싫었기에 인사만 하고 헤어지고 싶었는데, 그들도 전주가
있었는지 불콰한 얼굴로 잘 만났다며 술 마시러 가자고 자꾸 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것이 1차로 소주로, 2차로 호프집으로 밤늦도록
마셨다. 술집에서는 여기저기 온통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만투성이 같았다.
이대통령에 대해서. 박연차에 대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내관에 대해서.
심지어 악랄하게 나가겠다던 명계남에 대해서 까지...욕설이 난무한다.
선배들은 그래도 현직에 있을 때가 가장 좋았다면서 절대로 명예퇴직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까지 하는데... 그런 퇴직한 선배들에게 얻어먹기도
그렇고 내가 계산할 수밖에 없었다.
뜨볼. 닝기리. 자동차 기름 값 3만원 절약하겠다는 것이 기름 값의 3배를
낭비하고 말았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돈은 억지로 모아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느낀다.
청량리에서 전철 끊기기 전에 서둘러 전철을 탔다.
앞에 앉은 젊은 남녀는 남을 전혀 의식 안하고 영화에서나 보듯 껴안고
머리 결을 만지고, 가끔 쫍쫍! 새키스도 하는데 차마 볼 수가 없고 눈길
마주칠까봐 내가 더 미안해서 눈을 감았다.
녹천역까지는 안내 방송을 들었는데 술이 취해 깜빡 졸았나보다.
문득 눈을 뜨고, 여자들이 졸다가 눈이 마주치면 졸지 않은 척,
두 다리를 몇 번 털고 밖을 보며 위치를 확인하듯, 나도 다리를 털고
밖을 보니 망월사라고 했다. 아뿔싸.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급히 내려
갈아타려고 하는데 공익요원이 차가 끊겼다고 밖으로 나가란다.
지하철에서 조는 여자들은 용케도 자기 목적지에서는 반드시 깨서 정확히
내리드만 나는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그 때 어느 40대 여자가 지하철에서는 마지막 차라고 방송을 안했다면서
공익요원에게 항의하는 것이 보였는데 창동으로 가는 전철이 끊겼다는데
뭔 방송을 따진단 말인가.
밖에 나와 택시를 타려는데, 그 여자도 나와서는 택시를 타려고 하길래,
어디까지 가시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창동까지 간다고 한다.
나는 나도 창동까지 가는데 잘 됐다면서, 일행인 것처럼 타고 창동까지
가자고 했다. 택시비 따로 계산할 필요 없이 내가 부담하겠다는 호의였다.
나는 왜 이렇게 친절한 거야. 하하.
그런데 창동 가까이 오는데 느닷없이 그 여자가 기사한테
“저 아저씨는 창동에 내려주시고, D아파트까지 가요.”
창동에 와서 나는 택시비만 주고 내렸다. 이 무슨 황당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다정도 병 이련가. 내가 작업꾼으로 보였는가.
집에 도착하니 딸이 쇼파에 앉아서 티브를 보고 있었다.
나는 늦게 들어오는 것이 미안하고, 오늘 일이 황당하기도 해서 딸에게
전철에서 깜빡 졸아서 망월사까지 갔고, 전철이 끊겨서 택시타고 왔다고
했더니. 딸은 웃으면서
“술을 조금만 드시지요.” 하는데, 안방에서 아내가 나오면서
“그게 무슨 잘한 일이라고. 딸에게 자랑이라고 하는 겁니까?”
“......”
“지하철에서 술 취해 곯아떨어진 남자들 보면 꼴불견이드만,
우리 집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네.”
“......”
나는 할 말을 잃고 아무 말 없이 들어가 씻고서, 아내가 건드리지 못하게
이불을 돌돌 말고 침대에 누웠다.
복숭아꽃, 살구꽃, 벚꽃으로 꽃 대궐인 동산에서 우리는 손을 잡고 걷고,
벤치에 앉아 뻥튀기도 먹고, 김밥도 먹고, 캔 맥주도 하나씩 마셨다.
맥주를 마시고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그윽하게 나를 빨아 들였고.
입술에 하얗게 묻은 맥주 거품을 내가 핥아주고 싶어서 목 뒤로 팔을 걸고
끌어당길 때, 그 녀는 몸을 빼며 말했다.
“안 돼. 나는 아직 준비가 안됐단 말이야.”
“괜찮아, 무슨 준비가 필요 해?” 그러면서 다시 안으려 할 때.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아침 먹고 잘 거여요?. 아님 그냥 더 잘 거여요?”
눈을 떠보니 까만 스커트에 보랏빛 레이스로 장식한 블라우스를 입고
셋팅퍼머에 핑크빛 립스틱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여자가 아니고...
헝클어진 머리에 월남치마 같은 것을 입은 아내가 옆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황당 시추에이션 이란 말인가.
아닌데, 아닌데...머리를 흔들어보지만 아내는
“뭐가 아니란 말여요?”
“......”
“일어나세요. 북어국을 끓일까요. 콩나물국밥을 할까요?”
“라면이나 얼큰하게 먹고 싶은데....”
“라면 없는데 사올게요.”
식탁에 앉아 힘겹게 라면을 먹는데, 눈치도 없이 아내는 앞에 앉아서
나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다.
“아, 저리가!”
“어제 내가 뭐라 했다고 삐졌군.”
꽃이 피는 화창한 봄날. 살랑살랑 봄바람은 불고 있고만.
나는 매사 되는 일없이 모든 일이 뒤틀리기만 했다.
꿈속에서도 제대로 키스도 못하고. 흐흐흑.
그까짓 기름 값 아끼지 말고 운전하고 일찍 집에 오기나 할 껄...
2009. 04. 16. - 운 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