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포도를 안 먹는 이유
아주 오래 된 부질없었던 옛 이야기이다.
지금은 남가좌동에 캠퍼스가 있지만 남가좌동으로 이전하기 전 서소문
캠퍼스의 식품영양학과 출신의 나 보다 한 살 연상인 여자와 연애를 할 때,
우리끼리는 결혼을 약속하고 멀리 여자 집에 첫 인사를 갔었다.
해인사 인근 시골 농원이었는데 큰 과수원 입구에 2층 양옥으로 된 붉은
벽돌집이었다. 출입구에는 OO농원이라는 간판도 걸려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 지역 고등학교 교장이었는데 마침 그곳 장학사들과 점심 약속이
잡혔다고 해서 우리는 시간에 맞게 해인사 관광을 하고 오후 늦게 준비해 간 양주
한 병을 들고 여자의 안내를 받으며 찾아갔다. 아버지에게 예의를 갖춘다고
큰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앉았으며, 다행히 편히 앉으라고 권유하기에
마지못한 척 편히 앉았고, 누가 훈장 아니랄 까봐 뭔 이야기가 그리 길던지 지루한데,
요점은 자기 재산이 좀 있다는 자랑 같았지만 내가 자기 재산에 욕심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되고, 나를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에
더 땀이 났지만, 1차면담이 끝나고 우리는 시원한 2층 다락방으로 올라가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졌었는데 나는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처제 될 사람이 포도를 한 쟁반 가져와서는
반갑다고 했든가 축하한다고 했던가.
또 어머니가 오셔서 과일이라도 많이 먹으며 편히 쉬다 가라면서 마음을 놓게 해서 조금은
안정을 찾았었고 여자도 잘 될 터이니 걱정 말라고 위로해 주어 잠시 착각 속에 빠지기도 했다.
근데 여자는 자기만 먹으면 되지, 나에게도 포도를 권하며 내 입에 포도를 넣어 주는데
그 때 꽈리를 씹듯 꼭 눌러서 알만 내 입에 넣어주고 껍질만 빼가던 그녀.
뒤에 뭔 일이 닥칠지 전혀 염두에 없이 그 포도의 향긋하고 달콤하며 시원한 맛과 즐거움....
그 때처럼 행복한 순간도 없었을 것이다.
어린 제비새끼처럼 입만 벌리고 있으면 사랑하는 여자가 입에 달콤하게 넣어 주었으니까.
여자도 사랑하는 마음에 나한테 포도를 손수 먹이며 행복해 하지 않았었을까.
나는 차마 씨를 뱉을 수가 없어 씨까지 삼킬 정도였으니...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저절로 눈이 지그시 감겨진다.
하지만 나는 그 여자의 아버지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헤어져야만 했다.
반대 이유가 내가 아직 결혼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던가.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지. 결혼을 위해 급히 취업을 했고, 번듯한 직장 다니고 있으면 되었지.
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댄단 말인가.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설득 시킬 때까지 언제까지나 기다려 보자고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들의 사랑도 서서히 퇴색되고, 그녀는 결국 해군 장교와 결혼을 해서
나는 아픈 상처만 안고 내 사랑은 먹고 뱉은 포도 껍질 처럼 찢어져서 지저분하게 형태도 사라진
물거품처럼 그렇게 끝이 났다.
이별의 아픔을 겪고 그 후에 먹어 본 포도 맛은 전에 그 맛이 아니었고 어인 일인지
그 때부터 포도만 먹으면 입술이 따끔거려 견딜 수 없는 포도 알레르기가 생겨서 지금 까지
포도는 먹지 않는다.
아마도 상처가 깊었던 탓일까. 충격이 큰 탓일까.
의사는 사람마다 특정 식품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식품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란다. 아마도 정신과 상담을 받으면 알레르기가 없어질지도 모르지만.
다만 포도는 먹지 않지만 해마다 포도주는 담가서 술로 마시는데
한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그리고 한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마지막 한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느님을 위하여...
이렇게 속으로 조지훈의 [사모]라는 시를 생각하며 술을 마셨다.
아내는 내가 포도주를 무척 좋아하는 줄 알고 해마다 시키지 않아도 포도주를 커다란 유리병에
꼭 담가 놓는데 올해는 내가 포도주를 담그지 말라고 했더니 의아한 눈빛으로
'어쩐 일이세요. 술을 끓을려나. 아님 포도주가 이제 싫어 진거여요?' 했다.
나는 포도주가 이제 싫다고 하며 씩! 그냥 웃고 말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래, 이제는 망각이다. 잊어주마. 혐오스런 그 포도를...
사랑의 배신자에게 주는 가장 큰 복수는 망각이라 했던가.
어린애가 꼭 잡고 있다가 놓쳐서 날아가는 풍선처럼 이제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그 풍선을 훌훌 날려 보내고 싶다.
그러면 포도 알레르기도 없어질까.
2017. 7.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