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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동 여자

운명2 2017. 8. 25. 00:39


옆동 여자

얼마 전 불암산 등산을 하는데, 헬기장 거의 다가서 길가 바위에 한 여자가 힘들었는지 지나가는

사람들 신경도 안 쓰고 푹 퍼져서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길에서 조금 비켜 앉았으면 좋으련만

하는 마음으로 유심히 쳐다보았었다. 여자는 화장 안한 얼굴이 창백해 보이기도 해서

내가 괜찮으세요?’ 물어보기 까지 했다.
 나는 헬기장에서 앉아서 쉬다가 천병약수터로 혼자 하산하는 길에 갑자기 바위가 나타나고 길을

잘못든 거 같아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뒤에서 아까 그 화장 안한 여자가 내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괜히 반가움에 그 여자 뒤를 따라가며 이 길은 초행이라 길을 몰라서 머뭇거렸다고 하니

그 여자는 나만 따라오면 된다고 하며 자기는 이 길을 잘 안다고 했다. 그렇게 대화가 시작돼서

교회에서 낮에 칼국수를 먹고 커피를 4잔이나 마셨더니 속이 안 좋았는지 현기증이 나서 아까 길가

바위에 걸터앉아 물을 마시고 쉬었노라며, 내가 묻지도 않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얼핏 얼핏  보니 화장을 전혀 안한 얼굴이었지만. 그런대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찰색도 깨끗하게

보였다. 더구나 순수한 차림에 참하고 선한 인상이었다. 적당한 키에 날씬하지는 않았지만 그 나이

누구나 그렇듯이 뱃살이 좀 보이는데, 그렇다고 퉁퉁한 것도 아니고, 내 아내 보다는 대여섯 살 적어

보여서 속으로 아내도 저 나이 때는 더 예뻤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는데, 누가 묻기나 한 것처럼

자기는 등산할 때 화장을 안 한다고 하며, 화장 진하게 하고 산에 가는 여자들은 이해가 안 간다던가.
 그 여자는 자기가 화장안한 것에 대한 나름대로 변명을 하는 것 같았고,

자기도 화장하면 달라 보일 것이라는 인식을 나한테 심어주는 것 같게도 들렸다.

혹시 화장을 안 해서 내가 촌스럽게 생각하거나 무시하지 말라는 일종의 자존심이나 부탁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앉자마자 화장하는 젊은 여자들은 예의를 떠나 꼴불견이라고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들 상관없이 쳐다보거나 말거나 대담하게 작은 거울을 들고

입술을 움직여가며 눈을 깜빡거리고 하나하나 변장해 가는데 서 있는 내가 눈을 줄 곳이 없어

당황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정말 못마땅했었다.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나던지 하면 될 것을, 굳이 지하철의 많은 인파 속에서 해야 한단 말인가.

지하철에서 자리는 없고 목적지는 다가오고 다급했던지 서서 화장 하는 여자도 보았거니와 오후의

지하철에서도 화장하는 여자를 본 적 있기에 아무리 개성시대이고 자기 얼굴 자기가 변장하는데

무슨 상관이냐 하겠느냐 만은, 지하철에서는 다른 사람들 생각도 해야지, 남이야 쳐다보건 말건

대담하고 뱃장 좋게 아니 뻔뻔스럽게 화장을 하는 것은 좀 지나친 것 같기도 했었다.


 화제를 바꿔, 등산을 좋아하지만 산악회에서 가는 등산은 아침 일찍 집을 나와야 하기에 그렇고,

또 앞 사람 뒤만 보고 정신없이 따라가야만 하기에 경치를 감상할 여유도 없어서 싫다면서 가끔

이렇게 오후에 혼자 산을 다닌다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하면서 내려오다 보니 그 여자는 우리 옆동

사는 것이었다. 무엇 하나 뚜렷이 내세울 것 없는 미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흠잡을 데도 없는 아주

지극히 평범한 옆동 여자가 괜히 더 반가웠고, 나를 편안하게 해준다는 느낌에 갑자기 어떤 마력에

끌리듯이 호감이 가고 매력이 있어 보였다.

그 여자는 가끔 운동 삼아 불암산을 찾는다며 또 만날 수도 있겠다는 작업성 비슷한 말을 하기에,

나도 화답으로 무슨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아서 마땅한 멋진 말을 궁리하는 중에 우리는 어느 새,

아파트 입구까지 왔고, 때마침 아는 여자를 만났는지 그 여자와 서로 인사를 하고 무슨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고, 나는 뭔가 받을 것이 있거나 내가 줄 것이 있는 것처럼

쭈뼛쭈뼛 하다가 기회를 놓치고, 먼저 간다는 인사만 하고 아쉽게 헤어졌다
 
 다음에 같이 산에 가자고 하던가. 우리 카페에 가입하라고 하던가, 화장 안한 얼굴이 무척

예쁘다던가, 스타벅스에서 시원한 커피나 한 잔 하고 가자던가. 덕분에 즐겁고 편하게 등산했다는

말도 바보처럼 못하고 안타깝게도 마음에 동요만 일으키고 그렇게 끝났다.

얼마 전에 누군가 도보 길에서 나에게 그랬다. 결정적인 찬스에서 2%가 부족하다고...

그래서 맨날 헛물만 켠다고...

그러고 보니 슬프게도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 옆동은 출입구가 우리 동과 방향이 달라서 그 후로 그 여자는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다.

오늘도 진한 화장의 우리 옆집 여자는 보았지만, 옆동 그 여자는 화장을 하면 어떤 모습일까,

화장 안한 얼굴과 어떻게 다를까,
 무척 궁금한데도 영영 보이지를 않는다.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혜성처럼 사라졌다고나 할까, 그런데 혜성은 한 번 나타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주기가 제일 빠른 것이 60년이고, 보통은 수 백 년에서 수 천 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내 생애에

다시는 볼 수 없는 혜성이었을까.

염치불구하고 아니 용기를 내어 뻔뻔스럽지만 태연하게 당연한 것처럼 전화번호를 내가 먼저

물어보았어야 했나 보다. 그런데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옹알이 하듯 웅얼거리기만 했지,

입 밖으로는 안 나오는데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아침부터 옆동 출입구에서 하루 종일 마냥 지켜 볼 수도 없고.....

내가 시간 날 때 마다 오후에 불암산을 오르는 진짜 이유를 아내는 모를 것이다.

                                                                                   2017.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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